1932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부터 9·11 이후 2000년대에까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중동을 아우르는 역학관계의 역사를 단번에 설명해내는 <킹덤>의 타이틀 시퀀스는 제법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꼬리를 문 복잡한 기원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그 구구절절하고 진실을 파악할 수 없는 역사적 배경은 이처럼 간결하고 친절하면서도 시각적으로도 보기 좋은 형태로 정리가 가능하다. 그러니 현실정치와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아찔한 속도전 혹은 흥미진진한 액션을 즐겨보자.’
사우디아라비아의 평범한 미국인을 노린, 이슬람 보수파의 극악무도한 테러가 발생한다. 완벽한 가장이자 성실한 전문가인 FBI 요원 플러리(제이미 폭스)는 재닛(제니퍼 가너), 사익스(크리스 쿠퍼) 등 동료들과 함께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체면과 각종 정치적 사안을 고려한 미국 정부의 망설임, 열악한 수사력으로 테러범에 대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면서 안전을 이유로 이들의 수사를 무조건적으로 막으려드는 사우디 정부의 꽉 막힌 태도에도 불구하고, 동료에 대한 복수심에 휩싸인 FBI 요원들의 ‘무리한’ 수사는 조금씩 진전된다.
‘21세기 버전 람보’인가 싶은 이야기는 자동차 추격전과 총격전 등 액션스릴러의 익숙한 상황이 곳곳에 포진한 매끈한 장르물로 포장된다. 영화의 마케팅 역시 액션배우로서의 필모그래피가 더욱 긴 피터 버그 감독보다 장르의 장인, 마이클 만이 제작자임을 강조할 정도다. 그러나 그 어떤 복잡한 상황도 남자들의 땀내나는 격전지로 바꿔놓는 마이클 만은 민감한 현실을 소재삼지 않는 편이 낫겠다. 맡은 바 임무에 헌신하는 ‘우리편’, 사우디 경찰 알 가지(아샤라프 바롬)와 FBI 요원들의 인간적 교감을 비롯해서 영화 속 중요한 설정들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영화 밖의 맥락을 끌어들이며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제아무리 화려한 포장지로도 가릴 수 없는 현실이 있게 마련이다.
1992년 소말리아 내전에 뛰어든 미군 부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블랙 호크 다운>을 만들었던 리들리 스콧. 144분의 러닝타임 내내 21세기 전쟁영화의 교본을 다시 써내려간 그는, 영화의 마지막 단 한줄의 자막으로 최소한의 윤리를 확보한 바 있다. 감상적인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동료를 잃은 플러리와 할아버지를 잃은 테러범의 손자가 각기 미국과 사우디에서 동일한 저주를 내뱉는 <킹덤>의 마지막은 정확히 그와 반대되는 길을 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