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라는 유명한 논문을 <스크린>이란 잡지에 발표한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거의 3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멀비라고 하면 우선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읽히고 있는 그 논문부터 자동적으로 떠올린다. 비록 그동안 멀비가 그 논문으로 계속 돌아와 수정하고 확장하는 작업을 했지만 한편으론 이것 또한 부당한 일로 여겨진다. <1초에 24번의 죽음>이란 멀비의 최근 저서는 이런 생각부터 떠올리게 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굳이 ‘남성적 응시’에 대한 가혹한 이론 안에만 갇혀져 있지 않은 멀비, 그러면서 도발의 목소리보다는 성찰의 목소리를 내는 멀비를 보게 된다.
<1초에 24번의 죽음>이란 책은 우선 그 흥미진진한 제목부터 눈길이 가게 한다. 이것은 시네필이라면 대략 짐작하겠지만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작은 병정>(1960)에서 고다르는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1초에 24번의 진실’이라고 답했다. 이걸 바꿔서 멀비는 영화란 ‘1초에 24번의 죽음’이라고 대응한다. 물론 이것은 생명이 없다고 생각되는 프레임들에서 시작해 그것에 삶의 기운이 불어넣어지는 영화의 물질적 조건에 기초를 둔 생각이다. 멀비는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영화적 조건으로부터 출발해 어떻게 영화가 시간의 문제,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제와 공명하는가를 논의한다. 어쩌면 영화를 철학과 만나게 하려는 최근 영화이론계의 동향과 유사한 영역에 멀비가 끌린 것은 최근의 상황에 대한 학자적인 대응이었다. 그녀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이 영역에 더 많은 빛을 비춘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디지털 기술은 과거의 영화를 우리 앞에 끌어줬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정지, 가속, 역전, 재조합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영화를, 그 역사와 본질의 측면에서 되돌아볼 수 있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죽음’이 심심치 않게 운위되고 있는 지금은 알고 보면 지적인 낙관주의로 우리를 끌고 갈 수 있는 시대라고 할 수도 있다.
<1초에 24번의 죽음>은 그러나 아쉽게도 그 같은 낙관주의의 어떤 자취만을 보여주는 책이다. 멀비는 여기에서 시간, 지연, 운동과 죽음, 삶과 죽음이란 단어들을 도구로 삼아, 그리고 프로이트와 피터 브룩스, 바쟁, 바르트 등을 지적인 동반자로 해서, 영화의 여러 측면들에 대한 논의를 펼치지만 (부분적으로는 에세이 모음집이란 포맷 때문에) 그 논의를 일관성있게, 그리고 끝까지 이어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는 통찰력이란 측면에서 이것은 영화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리함을 맛보게 하는 책이다. 영화의 전사(前史)에 대한 논의, 사진 이미지에 대한 고찰, 실제 작품들에 대한 분석, 관객의 문제 등이 담긴 이 책을 읽고 나면 ‘지금에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