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일종의 복수극이지만 피 한 방울, 가벼운 주먹 한번 날리는 일 없이 매우 조용하고 서정적으로 복수를 치러낸다. 복수란 단순히 대상을 없애버리거나 신체에 물리적 위해를 가하는 것처럼 그려진 작품을 수시로 접했던 관객에게는 이 영화 속의 복수는 다소 낯설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음악 학교에 입학해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던 멜라니(데보라 프랑수아)는 심사위원인 아리안(캐서린 프로트)이 팬에게 사인을 해주느라 주위를 분산시키는 바람에 실수를 하게 되어 시험에 떨어진다. 그 뒤로 피아노 치는 것을 그만둔 멜라니는 10년 뒤 아리안의 집에 보모로 들어가 그녀의 커리어와 가족 관계 그리고 아들의 장래까지 모두 망쳐놓고 홀연히 그 집을 떠난다. 파리콩세르바투아르 출신 음악가로, 파리 플레이엘과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하기도 했던 드니 데르쿠르 감독은 음악가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일이 무엇인지를 섬세하게 짚어낸다. 극복할 수 없는 무대 공포증,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할 기회 상실 그리고 잘못된 연습으로 인한 근육의 훼손 이런 것들이 멜라니의 복수극을 위한 재료들이다. 여기에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아리안의 성적 정체성에 깊은 혼란을 주는 일까지 더해진다.
제목인 ‘페이지 터너’는 연주자 대신 악보를 넘겨주는 이를 가리키는 말로 보모로 취직했던 멜라니가 아리안의 공연에서 일시적으로 맡게 된 역할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페이지 터너가 전체 연주를 망칠 수도 있다’라는 호로비츠의 말을 빌려 그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리안의 연주를 위해 페이지를 넘겨주던 멜라니가 아리안의 연주자로서의 삶과 한 가정 내에서의 지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삶의 페이지를 넘겨주게 된다는 기본 설정은 무척 흥미롭다. 문제는 멜라니가 음악을 포기하게 되는 계기가 단순하게 제시된 것처럼 복수의 결말 역시 너무나 깔끔해서 밋밋하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가 극적 긴장감을 살리는 데 많이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뭔가 더 나올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지점에서 끝나고 만다. 클래식 선율을 타고 흐르는 인물간의 미묘한 심리전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음향 효과나 시각적인 충격을 통해 공포감을 자극하는 대부분의 스릴러들보다는 참신하게 다가오지만 긴장감을 유발하는 서스펜스나 치밀한 플롯에 의한 심리전의 재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