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를 넘기는 차가운 손길
꿈을 잃은 한 여인의 치밀한 복수가 시작된다...가난하지만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소녀 멜라니. 그녀는 부모님에게 반드시 유명 음악학교에 합격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시험장에서 심사위원장인 아리안의 행동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진 멜라니는 연주를 망치고 결국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는 아픔을 겪게 된다.
10년 후, 멜라니는 아리안 남편의 회사 인턴이 되고 아들의 가정교사로 아리안의 집으로 들어가지만 아리안은 그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오히려 멜라니에게 혼자서는 피아노 연주가 힘들다며 악보 넘기는 일을 부탁한다. 페이지 터너의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아리안의 든든한 보조자로 인정받은 멜라니...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 뒤로 서서히 10년 전 자신의 꿈을 망친 아리안을 향한 복수를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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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복수극의 새로운 패러다임!
<킬 빌>,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 최근 복수를 주제로 한 영화들은 언제나 선혈이 낭자하고 잔인한 장면들로 화면을 채우곤 했다. 설령 복수의 주체가 여성이라 할지라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페이지 터너>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면서 차분하고 조용히 상대방을 파멸시키는 한 여인의 복수를 보여준다. “복수란 단지 물리적인 폭력으로 행해지는 것만 아니라 심리적인 복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의 주인공 멜라니는 철저히 계산된 행동과 치밀한 계획으로 한 순간에 아리안의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클래식과 심리스릴러가 빚어내는 최고의 엘레강스 스릴러!
<페이지 터너> 즉, ‘악보 넘기는 사람’이란 제목답게 영화는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무표정하지만 꿈을 잃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멜라니와 예민하고 나약하며 감정 표현이 풍부한 피아니스트 아리안이라는 상반된 두 캐릭터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복수영화답지 않게 깔끔하고 안정된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주인공들의 섬세한 연기와 묘한 심리변화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어떤 식의 복수가 이뤄질지 가늠하기 힘들게 하며 영화 내내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은 은밀하게 영화의 불안감을 조성한다.
실제 음악학교 교수로서 영화 속 아리안처럼 심사위원을 맡아온 드니 데르쿠르 감독의 경험이 녹아있는 <페이지 터너>는 앤딩 크래딧이 올라가는 순간, 그 어떤 복수보다도 잔인하고 무서운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의 꿈을 망친 피아니스트에 대한 복수를 그린 <페이지 터너>는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세자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과 음악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바흐, 슈베르트, 쇼팽 그리고 쇼스타코비치까지!
클래식 음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페이지 터너>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 가곡의 왕 슈베르트, 피아노의 시인 쇼팽, 그리고 <번지점프를 하다>에 삽입되어 인기를 모았던 왈츠곡의 작곡자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풍부한 감성이 돋보이는 그들의 음악은 영화 속에 스며들어 관객들의 감성과 긴장감을 조율하며 <페이지 터너>를 더욱 매력적인 스릴러 영화로 완성하게 하였다.
영화에 삽입된 곡들은 대부분 단조곡으로, 단조 특유의 낮고 우울한 분위기 연출하며 영화의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아리안의 연주회에서 연주된 쇼스타코비치의 곡 ‘Trio No.2 for Violin, Cello & Piano in E Minor, Op. 67’은 그의 친구이자 음악학자인 ‘솔레르틴스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만든 곡으로 비장함과 슬픔, 고통, 연민이 묻어나는데 이는 마치 아리안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바흐의 피아노곡은 ‘건반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평균율’로 연주하기 까다로운 것은 물론 양손으로 쉴 새 없이 건반을 두드려야 하기 때문에 연주자들의 손가락, 손목 등에 무리를 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혹적인 곡이지만 아리안의 아들 트리스탄의 미래를 망쳐놓기 위해 안성맞춤인 곡인 것이다.
<페이지 터너>에서 배우들의 절제된 대사 사이에 생기는 침묵을 잔잔히 메우는 동시에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음악들은 ‘엘레강스 스릴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시종일관 우아한 무드를 유지하며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음악가 출신 감독다운 드니 데르쿠르의 탁월한 능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무대 위에 감춰졌던 존재, 제 2의 연주자 페이지 터너
‘페이지 터너(page turner)’란 악보 넘기는 사람을 뜻한다.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다 보면 악보를 넘길 손이 모자라게 되는데 이때 연주자 옆에서 악보의 페이지를 넘겨주는 사람을 가리켜 ‘페이지 터너’라고 부른다.
‘악보를 넘기는 사람이 연주 전체를 망칠 수 있다’는 호로비츠의 말처럼 페이지 터너는 복잡하고 어려운 연주에서 특히 없어선 안 될 존재다. 연주에 집중하고 있는 연주자 대신 악보를 넘겨줘야 하는 페이지 터너가 악보를 너무 빠르게 넘기거나, 너무 늦게 넘기면 연주의 흐름을 끊어 연주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피아니스트와의 호흡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실제 연주회에서도 악보 넘기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 연주자가 박자를 놓치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영화 속에서 아리안이 호흡이 잘 맞는 페이지 터너와 연주하고 싶어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페이지 터너는 악보를 넘기면서 연주자를 가려선 안 되고, 연주자를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가장 수수한 의상을 입어야 하며, 몸에 액세서리를 해서도 안 된다. 예민한 피아니스트는 페이지 터너의 긴장된 숨소리에도 영향을 받곤 하기 때문에 드니 데르쿠르 감독은 ‘페이지 터너의 역할은 일종의 자기소멸’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언제나 연주자 다음에 무대에 올라야 하고, 연주가 끝난 후 우렁찬 박수갈채가 쏟아질 때도 의자에 앉아 연주자들을 지켜봐야 하는 페이지 터너. 객석에 앉아 느긋이 연주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그 중요성을 쉽게 알 수 없는 무대 위의 또 다른 연주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