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야키 웨스턴 장고 Sukiyaki Western Django 미이케 다카시 | 2007년 | 121분 | 35mm | 일본 | 미드나잇 패션
하긴 불가능한 게 뭐가 있겠는가. 마카로니 웨스턴이 영웅적인 앵글로 색슨들의 서부극을 비정한 라틴식 개싸움으로 바꾸어놓은 지 어언 40여년이 흘렀다. 이제는 스키야키 웨스턴이나 카레 웨스턴도 나올 만하지 않을까. 황당한 서부영화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는 장르의 관습을 가져와서 ‘미이케 월드’의 신종 놀이기구로 만들어버리는 미이케 다카시의 변태적인 재능이 빛을 발하는 영화다. 황금이 묻혀 있다는 어느 산골마을에 라이벌 갱단인 겐지와 헤이케가 찾아온다. 카우보이 모자와 권총을 쥐고 무사도를 논하는 코스프레 갱단들 때문에 마을은 바람 잘 날 없다. 물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쉐인이나 장고이며, 다행히도 끝내주는 훈남 총잡이가 등장해 갱단들에 맞서기 시작한다. 간략하게 설명하자. 첫째, 이 영화는 아주 재미있다. 둘째, 일본인 배우들이 일본식 악센트로 영어 대사를 친다. 알아듣기 어렵다. 셋째, 액션장면은 두말할 필요없다. 넷째, 쿠엔틴 타란티노가 스키야키가 너무 달다며 여자를 패대기치는 전설적인 총잡이로 나온다. 입에 거품을 물고 넘어갈 게다.
빨간풍선 Le Voyage Du Ballon Rouge 허우샤오시엔 | 2007년 | 103분 | 35mm | 프랑스, 대만 | 갈라프레젠테이션
<카페 뤼미에르>에 이어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해외에서 만든 두 번째 영화인 <빨간풍선>은 프랑스 알베르 라모리스의 단편영화 <빨간풍선>(1956)에서 영감을 얻은 영화다. 자유로이 떠다니는 빨간 풍선을 따라가는 아이의 모습을 담은 원작은 2차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와 파리의 생활상을 어린이의 시점에서 담아내는 반면, 허우샤오시엔의 버전은 현대 도시의 고단한 삶을 그리고 있다.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하는 수잔은 현대 세계의 피로한 여성이다. 인형극의 성우 일과 강의를 동시에 하고 있는 그는 홀로 어린아이 시몽을 키워야 하는데다 아래층에 사는 이웃 때문에 한시도 쉴 틈이 없다. 마침내 그는 중국인 유학생 송(송팡)을 고용해 시몽을 돌보게 한다. 원작처럼 시시때때로 시몽 앞에 나타나는 빨간 풍선을 보여주지만, 감독은 “나는 빨간 풍선을 메타포 개념으로 생각지 않았다. 나는 이 영화가 잔인한 현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며 이 영화를 설명한다. 험난한 삶에 찌들었다가 서서히 치유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비노쉬의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다.
파라노이드 파크 Paranoid Park 구스 반 산트 | 2007년 | 90분 | 35mm | 프랑스, 미국 | 월드 시네마
<제리>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로 이어지는 ‘죽음 삼부작’의 간결한 에필로그. 한 스케이트 보더 소년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죽은 자는 반으로 잘린 채 피범벅의 몸으로 기찻길 위를 기어가다 사망한다. 하지만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는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어떠한 극적 긴장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비극적인 사건은 금세 잊혀지고 반 산트는 북미 스케이트 보더 문화의 편린들을 통해 소년의 내면을 건조하게 뒤따른다. <파라노이드 파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사운드영화’가 아닐까. 이미 <라스트 데이즈>에서 사운드의 텍스트를 실험했던 반 산트는 아예 영화 전체를 음악으로 도배해놓았다. 엘리엇 스미스처럼 익숙한 반 산트식 사운드로부터 거창한 니노 로타의 선율까지, 영화는 소년의 내면을 청각적인 이미지에 기대어 시처럼 읊어낸다. 크리스토퍼 도일과 캐시 리의 카메라는 조금 거칠어 보이지만 그건 <파라노이드 파크>가 반 산트의 가장 즉흥적인 잼 세션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무지의 시대 The Age of Ignorance 드니 아르캉 | 2006년 | 115분 | 35mm | 캐나다 | 월드 시네마
줄곧 냉소적이고 신랄한 태도로 세상을 풍자해온 드니 아르캉 감독은 <무지의 시대>를 통해 현대 세계를 정리한다. “현대는 또 다른 중세다”라는 감독의 이야기처럼, 이 영화는 현대 세계에 드리워져 있는 암흑을 폭로한다. 퀘벡주 정부의 공무원인 장 마르크는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의 역할은 시민들의 민원을 접수해 해결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가정에서도 그의 자리는 없다. 부동산업자인 부인은 그를 무시하며 두딸은 그를 아예 투명인간 취급한다.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쭉쭉빵빵 미녀들과 사랑을 나누는 백일몽이다. 꿈속에서 그는 특급 작가도 되고, 연출가도 되며, 사무라이가 되기도 한다. 그때마다 그는 대단한 미모의 여성들의 육탄공세를 받는다. 물론 잠깐의 꿈이 깨고나면 다시 팍팍한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 그는 한 여인에 이끌려 중세풍의 기사대결을 하는 모임에 나가게 되면서 인생의 변화를 겪게 된다. <무지의 시대>는 폭소를 터뜨리다가도 문득 슬픔이 밀려오게 만드는 성숙한 영화다.
야경 Nightwatching 피터 그리너웨이 | 마틴 프리맨, 에밀리 홈즈, 에바 버시스틀 | 2007년 | 134분 | 35mm | 영국, 캐나다
<털스, 루퍼> 연작으로 이미지와 디지털을 실험했던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이 네덜란드의 거장 렘브란트의 삶을 영화의 소재로 택했다. 17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계급사회의 문화가 드러나는 부분은 <영국식 정원살인사건>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정부> 등을 연상케 하지만 빛과 어둠, 사회와 개인의 내면을 은유하는 렘브란트의 그림은 피터 그리너웨이가 최근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성찰의 연장이다. 게다가 그가 이 영화에서 집중하고 있는 그림은 렘브란트의 마지막 작품이자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는 문제작 <야경>이다. 돈과 작업의 편의를 위해 딜러의 조카인 사스키아(에바 버시스틀)와 결혼한 렘브란트(마틴 프리맨)는 머스킷 민병대의 초상화를 의뢰받는다. 하지만 그는 작업을 하며 당시 네덜란드와 유럽사회의 어두운 면을 알게 되고 민병대 중 한명인 피어스 하셀버그의 죽음도 살인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성공한 화가 렘브란트가 당시 유럽사회에서 왜, 어떻게 불운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지 렘브란트의 그림과 독백을 통해 보여준다. 특히 바로크 양식을 미니멀리즘으로 재현한 듯한 극중 세트와 검정, 빨강, 노랑 등의 질감 차이가 남성과 여성, 죽음과 삶의 묘사로 이어지는 부분은 탁월하다.
자유로운 세계 It’s A Free World… 켄 로치 | 2007년 | 96분 | 35mm, 컬러 | 영국,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폴란드 | 월드 시네마
켄 로치 영화에 다시 축구장면이 등장했다.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된 <자유로운 세계>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직후 켄 로치가 다시 영국의 현재로 돌아온 영화다. 성희롱을 하는 손님에게 술을 끼얹고 해고를 당한 앤지는 자신의 친구 로즈와 함께 직업 중개소를 차려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이민자들을 모집해 사업을 확장하던 앤지는 곧 심각한 위험에 봉착한다. 이민자를 착취하며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던 영업은 곧 바닥이 드러나고, 화가 난 노동자들에 의해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잡힌 채 폭행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자유로운 세계>는 생생한 현실의 소음을 담아내는 켄 로치 현대극의 연장이지만, 흥미롭게도 이번에는 노동자들의 시선이 아니라 사용자의 시선에 서 있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세계>는 모처럼 접하는 켄 로치의 직설적인 조롱이다. <자유로운 세계>를 ‘전작을 뛰어넘는 걸작’이라 말하긴 힘들지만, 이제 거의 한해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내놓는 그가 반가울 따름이다.
검은 태양 Black Sun 크지슈토프 자누시 | 2007년 | 104분 | 35mm, 컬러 | 이탈리아, 프랑스 | 월드 시네마
발레리아 골리노는 이제 완전히 잊혀진 이름이나 다름없다. <프리다>(2002) 정도를 제외하면 활동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지만, 사실 최근 자신의 고향인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오가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었다. <검은 태양>에서 그녀가 연기하는 아가타는 궁궐 같은 대저택의 여주인이자 연하의 미남자 만프레디를 남편으로 둔 여인이다. 집안에서 거의 알몸으로 지내는 그들은 바깥세상의 공기는 아랑곳없이 그들만의 행복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건너편에 사는 남자가 만프레디를 총으로 쏴 죽이면서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게 된다. 첫 장면부터 카메라가 무대의 이곳저곳을 훑으면서 <검은 태양>은 고전적인 오페라 극임을 분명히 한다. 그 가운데 복수를 꿈꾸는 아가타의 욕망을 세밀하게 그려낸 크지슈토프 자누시의 연출력은 출중하고, 언제나 그의 영화의 음악을 맡고 있는 단짝 보이체크 킬라의 음악도 여전히 장중하다. 안제이 바이다와 더불어 폴란드영화의 거장으로 칭송받고 있는 자누시는 지난 2000년 특별전 게스트로 부산을 방문한 적 있다.
역(驛)의 로망 Crossed Tracks 클로드 를르슈 | 2006년 | 103분 | 35mm, 컬러 | 프랑스 | 월드 시네마
이제는 ‘고전’이라 불릴 만한 <남과 여>(1966)의 감독 클로드 를르슈의 신작이다. 사실 <사랑하기 위한 용기>(2005) 정도를 제외하자면 그의 최근 영화들은 하나같이 혹평에 시달렸다. 실제로 <역의 로망>은 계속되는 작품 실패로 인해 그가 가명으로 칸영화제에 출품했던 작품으로, 삶의 부조리에 관한 독특한 미스터리극이다. 성공한 여성작가인 주디스 라리처에게 사실은 숨겨진 유령 작가가 있다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법사’라 불리는 연쇄살인범이 탈출하고 그는 우연히 만나게 된 미용사의 남자친구를 연기하면서, 그녀의 고향집까지 가서 가족들 앞에 진짜 남자친구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가 바로 주디스의 숨겨진 작가다. 영화는 시간과 등장인물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관객과 두뇌싸움을 벌인다. 국내에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에이리언4> <아멜리에> 등에서 키 작은 개성파 배우로 각인돼 있는 도미니크 피뇽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갑다. 그는 마법사로 출연해 의외의 지적인 모습을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