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도 독립영화 완성제작지원작인 김영제 감독의 <알게 될 거야>
요즘 국제 영화평론가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많은 이들은 창조성의 기준으로 볼 때 한국영화가 하락세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한국 영화산업이 그저 잠시 취약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으며 이후에 회복할 수도 있다(예를 들면 2002년 말과 2003년 초에는 눈에 띄는 영화들이 얼마 없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 <지구를 지켜라!>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 <바람난 가족>,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그리고 <올드보이>와 같은 작품들로 강렬한 재기를 했다). 과거를 돌아보면, 잠시 가뭄 같았던 날들을 잊고 빛나던 것만을 기억하기가 쉽다.
그렇지만 국가별 영화업계들은 장기간의 퇴보로 접어들 때가 있긴 하다. 일시적인 부상과 하락의 경우 단지 어쩌다 걸린 우연이라 할 수 있지만, 더 심각한 쇠퇴의 경우 영화 제작환경 내면에 깔린 변화로 인한 것을 수도 있다. 한국 영화산업의 현재 상황과 구조는 분명 복잡하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다. 그러나 과거의 다른 국가별 영화운동들이 직면했던 상황들을 보고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 도움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1960년대 후반 일어났던 뉴 저먼 시네마라 불리는 운동은 정부보조금의 지원을 받았으며, 작가영화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었다(Autorenkino).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이 운동이 종결됐다는 일반적인 동의가 이뤄졌다(한 평론가는 “엄밀히 말해 죽은 건 아닌데, 더이상 살아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정부지원금이 어떤 특정 유형의 영화들만 지원하면서 산업을 왜곡시켰다는 의미에서 독일영화가 “보조금으로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가장 유명했던 감독들의 손실을 지적했다. 파스빈더는 1982년에 죽었고, 벤더스, 헤어초크, 슐렌도르프 등의 다른 감독들은 해외에 거주하거나 다른 영화업계에서 일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변화들도 일어났고 새로운 보수 정부가 비주류영화에 대한 지원에 덜 적극적이었다.
8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초 사이에 홍콩영화가 보였던 급격한 발전과 연이은 하락은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 뉴 저먼 시네마가 대체로 정부자금으로 만들어진 비상업적인 영화로 주로 구성됐던 반면, 홍콩영화는 정부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던 상업적인 성향이 중심을 이룬 산업이었다. 그런 작은 국내시장으로 홍콩 업계는 아시아 전역에 영화를 수출하며 생존해나갔다. 그러나 이것은 늘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다른 아시아 관객이 할리우드영화나 자국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더 많이 보기 시작했을 때 홍콩은 영향을 받았다. 오우삼, 성룡, 주윤발 등과 같은 유명한 홍콩 감독과 스타들 여럿이 할리우드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해적판 DVD의 확대도 감소된 수익으로 과거와 같은 많은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두기봉 같은 홍콩 감독들이 몇몇 계속해서 일하고 성공을 거둬들이긴 했지만,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홍콩 업계는 훨씬 더 작은 규모의 산업이 되었다.
한국 영화산업은 어떻게 보면 앞의 두 가지 상황이 혼재되어 있기에 더 안정적일 수 있다. 예술영화는 어느 정도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고 있고, 커다란 자국시장은 상업영화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영화가 갑작스러운 붕괴를 맞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쇠퇴의 조짐은 과거의 성공을 모방하려고 하는 지루한 30억원짜리 영화를 줄지어 만드는 가운데 드러날 것이다.
한국 영화업계는 분명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중 특히 불법 다운로드가 산업에 끼치는 영향이 있다. 미래에는 더 많은 문제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12월 선거는 궁극적으로 독립 혹은 예술영화의 지원금 마련에 영향을 끼치게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볼 때, 한국의 상황은 웬만한 데보다는 낫다. 어쩌면 더 큰 위험은, 장기간 성공 끝에 업계가 실험하거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될 경우에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