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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듯한 사랑 <여름궁전>

시대를 이겨내는 미칠 듯한 사랑, 그리고 10년 뒤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란 배제의 결과물이다. 역사란 기억할 만한, 혹은 기억해야만 하는 과거에 부여된 명칭이고, 수많은 과거‘들’은 역사가 되지 못한 채 누군가 떠올려주길 바라며 우물 깊숙이 고여 있다. 역사를 단지 과거의 주요 사건들의 집합처럼 오해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역사영화는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버린 역사에 감정을 불어넣는다. 역사영화에서 실제 사건은 단지 그것이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어느 누군가가 직접 체험하고 느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감정이입된 역사, 그것이야말로 일반적인 역사서술과 구별되는 역사영화의 독자성이다.

로우예의 <여름궁전>은 사건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쉽게 간과되는 그 시대의 정서를 되살려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천안문 사태로 기억되는 1989년을 얼마 앞두고, 위홍(레이하오)은 조선족 자치지역인 투먼을 떠나 베이징의 대학으로 진학한다.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지 못하던 위홍은 자유분방한 성격의 리티(후링)와 어울리게 되고, 그녀에게 소개받은 저우웨이(구오샤오동)와 격렬한 사랑에 빠져든다. 위홍은 그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날 것만 같아 불안하기만 하다. 미칠 듯한 사랑을 하던 그녀가 이제 불안함에 미쳐가는 것이다. 결국 위홍이 저우웨이와의 이별을 선택하고 방황할 무렵, 그리고 저우웨이에게 리티가 다가설 무렵, 불현듯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다. 연인간의 미칠 듯한 밀실의 열정이 광장에서의 격정적 구호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구호는 길게 지속되지 못했고, 역사적 상처의 봉합 과정에서 그들은 각자의 길로 갈라진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긴 시간의 중국사회를 관통하는 <여름궁전>을 두고 천안문 사태라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이 상호작용하며 극적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내기를 기대하기란 무리일 것이다. 실제로 로우예는 1980년대 후반부터 밀어닥친 세계사적 변화가 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여름궁전>이 천안문 사태를 다뤘다는 소문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관객이 감정이입된 역사로서 경험하는 것은 천안문 사태 그 자체가 아니라, 천안문 사태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적 공기와 중국사회의 변화가 남긴 여진에 의해 인물들의 삶이 어떻게 요동쳤는지, 하는 것이다.

로우예는 천안문 사태를 비롯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과감하게 압축할 뿐이며, 1980년대 이후 중국사회의 역사적 궤적은 현재의 격렬한 열정(그것이 자유화 운동이든 광란의 사랑이든 간에)에 온몸을 내던졌지만, 그로 인해 상처입은 미래를 돌려받아야 했던 청춘들의 삶 속에 알레고리적으로 새겨져 있다. <여름궁전>을 이끌어가는 위홍과 저우웨이, 그리고 리티는 변화하는 중국의 중심에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주변에서 서성거려야 했던 이중적 위치를 갖는다. 그들은 중국의 변화를 이끈 주역이면서도, 중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부초이거나, 심지어는 갑작스럽게 낯선 영토에 휑하니 던져진 이방인이다. 그들이 중국사회와 일치감을 형성하는 순간은 밀실의 사적 열정을 광장의 공적 구호로 내뿜을 때가 전부이다. 그 이전, 넘쳐나던 열정은, 그 이후, 말라버린 것이다. 성기 노출을 포함한 파격적인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섹스신들은 관객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기보다는 ‘슬픈 격정’의 정서, 심지어는 유일한 도피처에서도 편히 쉴 수 없는 자들의 노곤함마저 감돈다. 천안문 이후의 섹스신들은 특히 그러한데, 그 이전의 섹스신이 마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열정의 분출이었다면, 그 이후의 섹스신은 시대의 낙오자들간의 위로이거나 자위행위에 가깝다.

<여름궁전>에는 청춘 특유의 생동감이 때로 묻어나긴 하지만, 거칠게 흔들리는 핸드헬드의 카메라와 갑작스러운 점프컷 편집, 어두운 실내 공간의 묘사는 삶의 이정표를 상실한 채 방황하는 인물들의 발걸음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물론 이러한 미학적 시도는 그의 데뷔작에서부터 반복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여름궁전>은 로우예가 <수쥬>와 함께 새로운 시네아스트로 주목받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확신시켜줄 만큼은 아니지만, 장르영화와 예술적 자의식 사이에서 갈팡지팡했던 <자주빛 나비>의 실패를 충분히 극복했음을, 그리고 인물들이 침묵하는 순간을 그가 얼마나 영화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수많은 내레이션이 등장하지만, 기억이 머무는 곳은 인물들이 침묵하는 몇몇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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