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하진 지음 | 시공사 펴냄
만약 사랑과 마음의 평화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 하진의 <기다림>은 20년 가까이 선택을 피하고 기다림을 택했던 남자 쿵린과 그의 두 여자들 이야기다.
1983년 중국. 육군병원에서 내과의로 일하는 쿵린은 해마다 여름이면 이혼 청원서를 들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딸을 낳은 뒤 17년간 사실상 별거하고 있는 아내 수위와 이혼하기 위해서다. 병상에 누운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떠밀리듯 한 결혼이었는데, 수위는 시대에 맞지 않게 전족을 한 박색이었다. 린이 이혼을 원한 이유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린은 병원에서 함께 일하는 간호사 만나와 오랫동안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20대 중반이던 만나는 린의 이혼을 기다리다 40대가 되었다. 그래서 린은 여름이면 고향으로 가 아내에게 이혼을 청한다. 수위는 이혼에 동의하지만 법정에서 눈물을 보이고 마음을 돌린다. 린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병수발을 끔찍하게 잘 들었던 수위를 매몰차게 버리지 못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다.
“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소.” 린은 우유부단한 지식인이다. 의사로서의 일에는 성실하고 꼼꼼하지만, 그외의 일에는 다 수동적으로 대처한다. 고향에서 보내는 고작 10일간의 휴가 동안,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병원에서 수치를 당하고 쫓겨날 일이 두려워 만나와의 육체관계를 거부한다. 린은 나쁜 사람은 아닐지 모르지만 착한 사람도 아니다. 여자에게 사랑을 받는 데는 익숙해도 줘본 적은 없으며 빼앗기기 전까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줄 모른다. 탐욕스러운 것도 아닌데 늘 궁핍하다. 몽유병자처럼 무기력하게,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끌려가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후회하는 건 그의 현실이 정말 버겁게 느껴져서이다.
하진은 간결하지만 아름다운 묘사로 린의 고뇌와 점점 짙어지는 아이러니를 포착한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기다림이 마침내 끝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린은 양심을 내세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에게 기다림이라는 명분은 더없이 편리한 핑계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린은 자신의 기다림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자신의 행동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재미있는 점은, 그렇다고 린을 동정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린의 곤란은 읽는 이를 웃게 하고, 한숨짓게 한다.
하진의 <기다림>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이야기지만 영어로 쓰여졌다. 하진의 첫 장편소설인 이 책은 펜 포크너상, 전미 도서상을 수상했고 퓰리처상 최종후보에도 올랐다. 국내 출간된 단편집 <피아오 아저씨의 생일파티> <남편 고르기> 역시 이야기꾼으로서의 하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