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료 공장에서 일하다 약지 끝 살점을 조금 잃는 사고를 당한 이리스(올가 큐리렌코)는 공장을 그만두고 조그마한 항구 도시로 향한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발길을 옮기던 그녀가 도착한 곳은 어느 숲속의 표본실. 그곳에는 쓰디쓰거나 애처러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떤 물건을 표본으로 만듦으로써 그와 얽힌 기억과 감정을 봉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연으로 가득하다. 버리기에는 너무도 소중하지만, 간직하기에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시달려본 사람들이라면, 기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기억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영원한 망각을 위한 이 표본실에서 단 한 사람, 이리스만은 누군가의 영원한 기억이 되기를 바란다. 표본실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게 된 이리스는 원장(마크 베르베)으로부터 빨간 구두를 선물받는다. 원장은 이리스에게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구두를 벗지 말 것을 요구하고, 이리스는 자신의 발이 구두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과 비례하여 점차 원장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분홍신>(1948)의 분홍색 발레 슈즈를 상기시키는 빨간 구두에 길들여진 이리스는 결국 약지(사랑의 징표)를 표본으로 만들어 원장의 기억 한구석에 영원히 자리하고자 한다. 발에 딱 맞는 구두, 그것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우리는 때로 나와 타자간의 경계가 사라진 완전한 합일을 꿈꾼다. 하지만 구두닦이의 말처럼, 발과 구두의 경계가 사라졌다는 것은 구두가 발을 침범한다는 것, 즉 하나의 개체로서의 고유함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국내에 이름을 알렸던 오가와 요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약지의 표본>은 개인의 고유성을 내던지는 이리스의 선택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프랑스의 여성 감독인 디안느 베르트낭이 원하는 것은 이리스의 선택에 대한 가치 판단이나 영원한 사랑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원장과의 관계에 중독되어가는 이리스를 설득력있게 묘사하는 것이다. 영화 속 더위가 그대로 느껴질 만큼의 섬세한 미장센과 느리면서도 정적인 카메라 움직임이 원작의 몽환적 분위기를 영화적으로 꽤 훌륭하게 번역하고 있지만, 그것이 스스로를 봉인시킴으로써 누군가의 영원한 기억이 되고자 하는 이리스의 행동을 공감시키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