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용 장편’이라는 개념을 이만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경우가 또 있을까? 영화 <심슨가족, 더 무비>와 원작 TV시리즈의 결정적 차이라곤 약 4배로 늘어난 에피소드의 길이와 와이드스크린 비율로 넓어진 화면 너비가 전부다. <심슨가족, 더 무비>는 캐릭터와 사건의 성격, 표현 수위, 농담 색깔은 물론, 오락성과 완성도마저 TV시리즈 <심슨네 가족들>의 평균치다. 요람 격인 폭스사를 놀려먹는 버릇까지 그대로다. 스크린 하단에 방송 예고가 흐르면 “그래요, 폭스는 영화 상영 중에도 채널 광고를 하죠”라는 자막이 뜬다. 뒤집어 말해, 매트 그뢰닝과 제임스 L. 브룩스를 비롯한 <심슨네 가족들>의 창조자들은 텔레비전 우주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마음껏 해보지 못한 작업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극장용 영화로서 <심슨가족, 더 무비>가 구가하는 자유는 주로 공간적 여유다. 관객은 브라운관에서 익힌 스프링필드 시가지를 파노라마, 360도 등의 참신한 앵글로 둘러볼 기회를 얻는다. 횃불을 든 이웃들이 심슨네로 몰려오는 군중신이나 배경 그림에는 3D 표현도 눈에 띈다. 알래스카라는 제2의 배경 역시 다분히 화면을 고려한 선택으로 보인다.
400편에 달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온갖 이슈를 건드리고 무수한 문화상품을 패러디해온 <심슨가족, 더 무비>는 환경문제를 장편 소재로 골랐다. 미국에서 가장 심하게 오염된 호수로 뽑힌 스프링필드 호수에서 밴드 그린데이가 경각심을 일깨우는 콘서트를 벌이다 익사한다. 그들의 장례식이 열린 교회에서 호머(댄 카스텔라네타)의 아버지 에이브러햄이 멸망을 암시하는 신의 계시를 전한다. 곧이어 돼지 분뇨와 관련된 호머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 스프링필드의 환경 오염을 극히 위험한 수준으로 악화시키고, 예언은 실현된다. 아놀드 슈워제네거 대통령이 아무 생각없이 이끄는 연방 정부는 스프링필드에 거대한 돔을 씌워 격리한다. 이웃의 분노를 피해 탈출한 심슨 가족은 알래스카로 이주하지만, 정든 고향이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을 안 마지(줄리 캐브너)는 삼남매를 데리고 반성 모르는 남편을 떠난다. 호머에게도 불가피한 각성의 시간이 다가온다. 영화의 흐름은 발단과 전개 대목이 두툼하고 결말이 단출하다. 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용두사미’식 구조는 <심슨네 가족들> 시리즈에서 전통에 가깝다.
<심슨네 가족들>의 매혹은 무정부적이고 전복적인 감수성과 밝고 따뜻한 성정이 어우러진 웃음이다. 흔히 평자들은 이러한 양 갈래 미덕의 수원지를 매트 그뢰닝의 진보적 풍자정신과 제임스 L. 브룩스의 휴머니즘에서 찾는다. <심슨가족, 더 무비>에서 “돈 많은 백인 남자가 권력을 잡는 시대가 겨우 왔군”이라는 반즈 회장의 대사가 전자의 예라면, 마지에게 매달리며 “난 그저 다시 당신 옆자리로 돌아와 누울 때까지 다치지 않은 채 하루를 견디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 뿐이야”라는 호머의 대사는 후자의 예다. 이 가족과 안면이 있는 관객이건 아니건 <심슨가족, 더 무비>는 99%의 확실성으로 웃음을 주는 코미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가려낼 수도 없는 촘촘한 패러디와 비주얼 조크, 고도로 함축된 한 줄짜리 농담들은 18년간 그래왔듯 객석으로부터 “나는 이 농담을 이해했다”는 미량의 우월감이 섞인 폭소를 끌어낸다.
<심슨가족, 더 무비>에서 호머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깨닫고 리사는 마음에 드는 소년을 만나며, 바트는 성실한 가장인 옆집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하고 은밀히 소망해본다. 장편답게 각각의 인물은 나름대로 성장의 여정을 거친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일이다. 심슨 가족의 세계를 지탱하는 불문율은, 인물들이 결코 나이 들지 않으며 결코 발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반복 재생산되는 결점과 과오들을 그리기 위해 이 시리즈는 존재한다. 발전도 없는 이야기를 왜 극장까지 가서 봐야 하냐고? 심슨네 막내 매기가 내뱉는 첫마디 말이 궁금하지 않은지? 그걸로 부족하다면 노출장면도 꽤 포함돼 있음을 첨언한다. 딱히 원하는 인물의 누드는 아니겠지만. 하나 더! <심슨가족, 더 무비>의 엔딩 크레딧은 참을성있는 당신에게 보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