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내내 하루 24시간 일하겠다는 영화사가 있다. 이름부터 24/7 픽쳐스다. 요즘 같은 불황의 시기에 하루 꼬박 일하겠다는 각오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지난해 말 제작사를 차린 진원석 대표의 설명을 듣다보면, 하루 24시간 일을 하겠다가 아니라 하루 24시간 일을 해야 한다. 연세대 불어불문학과를 중퇴한 뒤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영화를 전공한 진 대표는 미라 소비노, 금성무, 김혜수 등이 출연한 데뷔작 <투 타이어드 투 다이>(1998)로 선댄스영화제에 입성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2년 전 신작 <엑스펫츠> 제작을 위해 긴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온 그에게 감독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영화의 마지막 블루오션은 해외”라며 글로벌 프로젝트 전문 제작사를 차린 이유를 물었다.
-24/7 픽쳐스라. 회사 이름이 독특하다. =그렇게 지어놓으니까 삶이 그렇게 바뀐다. 매일 24시간, 1주일 내내 뛰어야 할 것만 같다. 얼마 전까지 미국의 한 스튜디오와 프로젝트를 논의하면서 전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는데 그쪽에서 그러더라. 넌 잠도 안 자냐고. 그때 우리는 ‘투웬티 포 세븐’ 내내 언제나 대기 중이라고 농담한 적이 있는데 그게 회사 이름으로 이어졌다. 거창한 목표를 정하기보다 열심히 영화하겠다는 마음으로 지었다. 누구는 이런 회사는 노동부에 신고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 말로 회사 이름을 부르기가 쉽지 않다. =안 그래도 그런 불평을 한다. 247로 불러야 하나. 24와 7로 불러야 하나. 247이라고 하면 영화사가 아니라 이삿짐센터 같고. 직원들하고는 ‘투웬티 포 세븐’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이들도 익숙해지겠지.
-직원들은 이전부터 함께 일했던 이들인가. =아니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 2명 있는데, 둘 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고 일했던 이들이다. 우리말이랑 영어는 기본으로 할 줄 알아야 하니까. 한 친구는 만다린어와 광둥어까지 할 줄 안다.
-때론 영어로 말하는 게 더 쉽겠다. =회의 때는 많이 섞어서 말한다. 그러다보니 같은 층을 쓰는 다른 회사 사람들로부터 눈총도 받는 편이다.
-제작사를 차린 건 본인이 연출할 작품 때문인가. =보통 감독이 영화사 차리면 그렇게들 생각한다. 24/7 픽쳐스는 아니다. 연출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내 작품이라고 우대하진 않는다. 내 것도 당연히 경쟁을 해야 한다. 먼저 세팅이 되는 작품이 우선이다. 24/7 픽쳐스는 개인의 연출 욕심을 위한 회사가 아니라 글로벌 프로젝트를 만들기 위한 공간이니까.
-글로벌 제작사를 차린 계기는 뭔가.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쪽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좋은 사례가 없었으니까. 한국에서도 해외 프로젝트에 대한 고민은 많은데 그간의 흥행 성적을 감안하면 쉽지 않고. 건방진 말일지 모르겠지만 할리우드에서도 통할 수 있는 한국 감독은 많다. 반면 정작 한국의 재능과 할리우드의 시스템을 접합할 만한 프로듀서들이 많지 않다. 오우삼 옆에는 테렌스 창이 있었고, 그래서 할리우드에 갈 수 있지 않았나. 한국에는 테렌스 창 같은 존재가 없다. 미국 영화인들도 나보고 프로듀서 하면 잘하겠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내가 갖고 있는 노하우나 네트워크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기획 단계부터 해외를 겨냥한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춰보자. 글로벌에 올인해보자, 뭐 그렇게 된 것이다.
-감독으로서는 프로듀서 잘하겠다는 칭찬이 썩 좋게 들리지 않았을 텐데. =영화일 하는 게 언제나 평가받고 사는 일이잖나. 싫은 소리 견디는 것이야 뭐. 내 입장에선 작품 하나 하겠다고 몇년씩 기다리는데 그러다보니 내 능력을 허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제작자의 경우 회사도 꾸려야 하고. 감독과는 책임 영역이나 부담이 다르다. =여러 작품을 동시에 돌리다보니 어떨 때는 헷갈리기까지 한다.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신나긴 하다. 연출을 하면서도 일정 부분 프로듀서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 낯선 일은 아니다. 다만 투자나 캐스팅이 안 되면 감독으로서는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내가 나가서 공격적으로 엮어볼 수 있으니까 덜 답답하다.
-싱가포르쪽과 공동제작하는 <댄스 오브 더 드래곤>이 첫 타자다. 제작자로서 촬영장에 가보니 어떻던가. =일찍 촬영장에 안 나가도 되니까 그건 좋다. 물론 감독을 보면서 저건 이렇게 찍어볼 수도 있지 않나 싶어 몸이 근질거리긴 하는데, 내 역할은 아니니까 단념해야지.
-촬영은 얼마나 진행됐나. =40% 정도 찍었다. 9월 중순까지 촬영할 예정이다. 7주에 42회차 촬영이다. 1주일에 6일씩 촬영하는데 1일 촬영시간 12시간을 지키고 있다. 오버된 촬영이 2회 정도 있었지만 순조롭다.
-싱가포르의 이스턴라이트라는 회사는 어떤 곳인가. =아크라이트라는 미국 영화사의 자회사다. 아크라이트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로드 오브 워>와 <베니스의 상인> 등을 투자, 배급했다. 메이저라고 부를 순 없지만 인디쪽에서는 손꼽히는 규모다. 다크라이트라고 해서 호러 전문 레이블도 갖고 있고. 아크라이트가 이스턴라이트를 차린 건 싱가포르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또 경제 허브이니까. 싱가포르 관광청의 지원 약속 등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아크라이트는 회사를 차리기 전부터 직접 연출할 생각으로 준비 중이던 <엑스팻츠>(Expats)에 투자사로 참여하겠다고 해서 알게 됐는데, 우리가 들어가면서 원래 중국 배우가 하기로 했던 걸 한국 배우로 바꾸고 일정 분량 촬영도 한국에서 찍기로 바뀌었다.
-아시아에 대한 할리우드의 관심은 어느 정도인가. 한국에선 지난해에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시나리오작가들을 물색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웨인스타인 형제도 꽤 큰 규모의 아시아 펀드를 만들었잖나. 그 돈으로 <7인의 사무라이>를 리메이크 하는 것이고. 할리우드야 어떻게든 시장을 넓히고 싶어하니까. 그냥 자기들 영화만 트는 것에서 벗어나서 다른 방식으로 시장에 접근하는 것이다. 거대한 중국시장과 할리우드 다음으로 큰 일본시장에 대한 관심도 있고. <와호장룡>은 북미에서 1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으니 자국에서도 가능성이 있고. 한국과 같은 작은 시장에서 <괴물> 같은 초대형 흥행작들이 나오는 걸 보면서도 아시아가 뭔가 있긴 있구나 싶은 거지. 15년 정도 친구로 지낸 안토니 브래그먼이라고. <이터널 선샤인> <21그램> 등을 제작하고 지금은 찰리 카우프만의 감독 데뷔작을 만들고 있는 친구인데, 그 또한 한국 감독들에 대한 관심이 아주 높다. 물론 제안을 받아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국 감독들로서는 선뜻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24/7 픽쳐스가 가교 역할을 할 생각이다.
-<댄스 오브 더 드래곤>에 장혁이 출연한다. 장혁은 영어가 능숙한가. <영어완전정복>에 출연하긴 했지만. (웃음) =유창할 필요까진 없다. 볼룸댄스를 배우러 싱가포르를 찾은 유학생 역할이니까. 다만 영어가 굉장히 빨리 늘더라. 대개 능숙하지 않으면 말하길 주저하는데, 장혁씨는 무데뽀로 뱉는다. 최근에 싱가포르에 갔을 때는 영어로 반기더라. 맥스 매닉스 감독도 흡족해하는 수준까지 올랐다. 장혁씨는 영어 외에 파사도블레라는 어려운 춤도 배워야 하고 또 영화에 무술장면도 있다. 다행히 무술은 본인이 절권도를 오래 해왔으니까 쉽게 해결이 됐다. <드래곤>(1998)에서 브루스 리로 나왔던 제이슨 스콧 리와 연기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본인도 굉장히 즐거워하고.
-시나리오는 누가 썼나. =감독이 직접 썼다. 호주 출신인데, 일본에서 10년 넘게 살았을 정도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많다. <손자병법>을 시나리오로 만들어서 할리우드에 팔기도 했고. 아크라이트와는 그걸 인연으로 알게 됐는데, 양쪽이 같이 싱가포르에 회사를 차리게 된 거다. 어렸을 때 엄마 손잡고 볼룸댄스 경연대회를 우연히 본 뒤 춤에 대한 판타지를 갖게 된 아이가 성장해서 싱가포르에 있는 유명한 볼룸댄스 학교에 오디션을 보러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올해 아메리칸필름마켓(AFM)부터 마케팅을 시작할 예정이다.
-한국에 머물게 된 외국인들이 한국의 조폭들과 충돌한다는 <엑스팻츠>의 경우 준비한 지가 꽤 오래됐다. 웨슬리 스나입스 출연 보도도 있었고. =그건 오보였고. <엑스팻츠>는 캐스팅에 달려 있다. 캐릭터들이 떼로 나온다. 그동안은 스케줄 조정이 쉽지 않았다. 지금은 맷 데이먼 소속 회사에서 캐스팅을 맡아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현재로서는 크리스 클라인이라고 <아메리칸 파이>에 나왔던 배우가 출연 약속을 한 상태인데 이제는 내가 다른 프로젝트들을 굴리느라 당장 여력이 없다. 내년 여름 예정된 할리우드 파업 때를 노려서 배우들이 놀게 되면 그때를 활용해서 찍을 계획도 갖고 있다. (웃음)
-그 밖의 프로젝트들은 어떤 게 있나. =해양호러 스릴러라고만 부르고 있는 <머메이드>(Mermaid)를 비롯해서 3작품 정도를 더 개발 중이다. <머메이드>는 짐 캐리가 소속되어 있으며 <배트맨 비긴즈> 등을 제작한 모자익 미디어 그룹과 같이 진행한다. 감독은 제네비에브 졸피라고 영국 출신의 여성감독이다. 이전에 호러 2편을 만들었는데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능성이 있다. 우리 것 말고 워너쪽과도 한편 계약을 맺을 정도니까. 우리의 아이템을 갖고서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을 할 계획이고, 타이 등지에서 촬영할 예정이다.
-글로벌 프로젝트를 성사하기 위한 24/7 픽쳐스의 전략은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 할리우드와의 협업인 것 같다. =장르영화에 초점을 맞추는 건 당연하다. 컨셉이 좋으면 저예산으로 만들 수도 있다. 스타에 대한 의존도도 떨어진다. 또 협업을 하는 건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미국 가면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다. 설령 기회를 잡는다고 해도 단물만 뽑아먹고 차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신뢰있는 파트너와 일하는 것이다. <와호장룡>도 일종의 퓨전인데, 미국시장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기획 단계서부터 개발하려고 한다. 스튜디오가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릴 때 진짜 하고 싶은 것을 꺼내놓아도 늦지 않다.
-뉴욕 비주얼 스쿨 오브 아트로 유학간 게 1989년이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학위증을 보여드려야 하나. (웃음) 하버드도 아니니, 뭐.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문화원을 들락거렸다던데. =중학생 때부터 갔으니까. 문화원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검열이 없다고 해서 누드장면이나 좀 얻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간 거지. 처음 본 영화가 <Z>였는데, 영어자막인데다 유명한 영화인지도 모르고 봤다. 가슴 노출은 있더라. (웃음) 그 이후로 계속 다니면서 고다르도 보게 되고.
-프랑스영화에 곧장 빠져든 것인가. =아니. 프랑스영화에 대한 관심은 뉴욕에 가서 본격적으로 고다르나 리베트 영화를 챙겨 보면서 일었던 것이고. 우리 세대가 대개 그렇듯이 내 우상은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중학생 때 영화감독 되겠다고, 그러려면 먼저 스필버그한테 단편을 하나 보내야겠다 싶어서 비디오카메라 갖고 있는 친구 꼬여 이태원에서 영어영화를 만들려고 한 적도 있다. 하루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아무것도 찍힌 것이 없어서 망연자실한 적도 있고. 그러다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마틴 스코시즈나 우디 앨런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스필버그는 잠시 미뤄뒀다. 뉴욕으로 유학갈 때는 부모님에게 스필버그를 들먹이며 딜을 하고 투자를 받았지만. (웃음)
-원금은 돌려드렸나. =아니. 지금도 부모님은 그러신다. 언제 다시 미국 가냐고.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유학 뒤 미국에서 자리잡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는 특히 어렵다. 무슨 자격증을 따는 것도 아니고. 학교에선 졸업장 주면서 바이바이하고. 영화과 나왔다고 해도 그래 나왔냐 하는 분위기이고. 리안도 유학생으로 가서 단편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장편 데뷔는 대만에서 했잖나. 뉴욕이 다문화가 공존한다고 하지만 그곳의 문화를 어릴 적부터 체험한 것이 아니라면 기회를 잡는 것이 쉽지 않다.
-데뷔작 <투 타이어드 투 다이>는 미라 소비노가 출연해서 화제를 모았는데.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답답한 원룸이 싫어서 카페에서 1달러50센트짜리 커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데 예쁜 여자애가 시나리오를 보고 있더라. 그때만 해도 걔가 누군지 몰랐지. 말을 붙일까 하다가 포기하고 화장실에 갔는데 얼마 뒤에 내 뒤에 와서 줄을 서더라. 그래서 말을 걸었다. 시나리오 재밌냐고. 폴 소비노랑은 뭔 관계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라고 하더만. (웃음) 중국에서 8개월을 산 적이 있어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그렇게 만난 뒤에 오우삼 감독의 <하드 타겟> 개봉에 맞춰 작은 파티가 열렸는데 같이 가서 <첩혈쌍웅>이었나 <첩혈속집>이었나 여튼 같이 상영하는 전작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투 타이어드 투 다이> 관련해서 재미난 사실이 하나 있다. 뉴욕에선 영화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1년에 30편 정도의 인디영화 시나리오 낭독회를 연다. 내 것도 끼었는데, 그때 내 시나리오 리딩에 참여했던 배우가 스칼렛 요한슨과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의 리브 슈레이버였다. 스칼렛 요한슨은 그때 10살이었는데, 시나리오 리딩이 끝난 뒤 너무 연기를 잘해서 기립박수를 받을 정도였다. 나중에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출연하기 직전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어서 나를 기억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자기 빼고 영화 만들었냐고 성질을 부리더라.
-데뷔작의 경우 국내에서 흥행이나 평가가 별로 좋지 않았다. =지명도있는 배우들이라서 여러 나라에 팔리긴 했다. 브라질에선 액션영화처럼 포장이 되는 바람에 내가 포스터에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 보면 알겠지만 내가 잠깐 카메오로 총 들고 나온다. 미국 같은 경우 미니멈 개런티가 많지 않아서 투자사였던 일신창투가 포기했고, 2∼3년 뒤에 다시 배급사가 붙었는데 이번엔 그 회사가 뉴욕 개봉을 앞두고 도산했다. LA와 샌프란시스코에서만 잠깐 선보인 게 전부다.
-선댄스 출품까지 됐는데. =그때만 해도 좋았다. 가서야 가는 것만으로 전부가 아니구나 알았지만. 대런 애로노프스키쪽에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난 결국 들러리를 섰구나 싶었다. 그 뒤에 스파이크 리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하나 준비했다. 헤더 그레이엄이 출연하기로 했고. 그런데 이번엔 프로젝트가 좀 커지니까 시나리오작가가 욕심을 부리더라. 판권 확보를 하지 않은 채 같이 작업했는데, 나중에 엄청난 돈을 부른 거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코즈모 닷컴의 성공과 몰락을 그린 다큐멘터리 <스타트 업!>에는 당시 방황하던 내 심정이 반영되어 있다. 동시에 다큐 찍으면서 내 첫 영화를 돌아보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가들을 부인했었는데, 아 나한테 많은 문제가 있었구나 인정하게 됐다.
-타블로도 다큐 찍으면서 만났다고 들었다. =한번은 스탠퍼드 학생이 뜬금없이 메일을 보냈더라. 영화 하고 싶은데 자신이 지금 뉴욕에 놀러왔다면서. 만났는데 똑똑하더라. 나 학교 다닐 때 생각도 나고. 돈 못 주는데 괜찮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서 연출부가 됐다. 할렘에서 혼자 버티면서 후반작업 테이프 정리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나중에 한국에서 영화, 음반 사업 하는 분을 소개해준 적이 있는데 그게 계기가 돼서 가수로 데뷔하게 됐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도 많은 감독들이 데뷔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극받았던 감독이 있다면. =김기덕 감독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개봉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시선들이 분명 이전보다 레벨업됐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만들겠다고 맘먹으면 만들어내는 힘이 부러웠다. 내 10년과 김기덕 감독님의 10년이 비교되기도 하고. 내년에 모마 현대미술관에서 김기덕 감독님의 회고전이 열린다고 하던데. 아웃사이더의 시선으로 사회에 대해 분노가 영화에서 느껴지는데, 어쩌면 그 분노가 영화를 끊임없이 내놓는 힘의 근원이 아닐까 싶다.
-20대엔 유학생, 30대엔 감독, 40대엔 제작자 타이틀을 달았다. 돌아보면 어떤가. =스물아홉에 데뷔했으니까 빨리 한 편이다. 스타트만 보면 화려하지. 하지만 인간으로선 별로 성숙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다. 결승점이라고 생각하고 뛰었는데 막상 시작점인 것을 알고 나서의 막막함을 느꼈던 30대에, 외려 순탄해야 할 그 시기에 삐그덕하면서 더 많은 걸 배웠다. 온탕과 냉탕 오갔으니 이제는 영화 많이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