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맨, 천국을 만나다> 대니얼 타멧 지음, 배도희 옮김 | 북하우스 펴냄
전혀 몰랐던 아이슬란드 언어를 4일 만에 습득해 아이슬란드의 TV토크쇼에 출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행복할까. 5시간9분 동안 한번의 실수도 없이 파이(원주율)의 소수점 이하 숫자 2만2514개를 암송할 수 있다면 명예로울까. 대니얼 타멧은 10개 언어를 구사하고,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 줄 알며, 만나자마자 당신의 60살 생일이 무슨 요일인지 계산해낼 줄 아는 ‘브레인맨’이다. 그렇지만 신은 그에게 처음부터 행복과 명예를 안겨주지 않았다. 타멧은 고기능 자폐서번트다. 아스퍼거 장애를 갖고 태어났고, 네살 때 심한 간질 발작을 일으킨 뇌기능 장애를 갖고 있다.
<레인맨>이나 <말아톤>에서 보여주듯, 아스퍼거 증후군을 포함한 자폐증은 철의 장막을 두른 인격을 선사받았다. “말을 할 때면 거의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눈을 맞춰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말을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지도 않고 혼자서 줄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화 중에 잠시 숨을 돌린다거나 상대방에게 말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워낙 보고 읽은 것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어서, 대화 도중에 어떤 단어나 이름을 들으면 도미노처럼 연상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소년 타멧이 왕따의 길을 벗어나기 어려우리라는 건 자명하다. <브레인맨, 천국을 만나다>가 책으로서 즐거운 건, ‘나는’이라는 1인칭 화법으로 그와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자폐의 내면과 생생히 대화할 수 있는 기회란 흔치 않다. “나는 아침조회를 정말 좋아했는데,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벌어지는, 그야말로 예측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책으로서 유용한 건, 아스퍼거 증후군의 특이한 세계를 알기 쉽게 들려준다는 점이다. 뛰어난 화가가 이미지에 대해 갖고 있는 공감각적 능력을 그는 숫자에 대해 갖고 있다. “뉴욕에서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했을 때, 나는 레터맨이 숫자 117처럼 보인다고 말해주었다. 키가 크고 홀쭉했기 때문이다. 타임스스퀘어 광장에서 우뚝 솟은 초고층 건물들을 올려다볼 때는 온통 9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 9는 무한함을 연상시킨다…. 189 같은 전화번호는 116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진다.” 숫자와의 교류 능력이 2만5천개의 파이 숫자를 외우게 해주고, 라스베이거스의 블랙잭 게임을 주도하게 해주었다. 또 “어떤 단어와 그 단어들의 조합은 너무나 신비로워서 마치 빨려들어가는 것 같”아서 맘만 먹으면 어떤 언어든 불가사의한 속도로 체화해낸다.
그는 고독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쓸쓸하고 힘겨운 사춘기를 보냈음에 틀림없다. 초등학교 졸업반이 되어서야 첫 친구를 사귈 수 있었고(상대는 호메이니 정권을 피해 온 이란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장기입원자를 위한 정신병동에 머물렀으며, 10대 중반에 자신을 게이라고 인정하게 됐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까. 고립된 인격과 취향이 자신만의 출구를 찾아냈다. “159개국 8465명이 참가한 서울올림픽은 아주 신기하고 놀라운 장면들이 많아서” 세계의 수많은 나라, 수많은 언어를 알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했고 파고들게 했다. (원래는 도서관 사서나 우편물 분리 같은 숫자와 언어에 둘러싸인 일을 하고 싶었지만 벽에 부딪혔던 터라) 해외 자원봉사를 모집하는 광고에 흥분을 느낀 건 당연했다. 스물살이 채 안 돼 1200km 떨어진 리투아니아로 가서 그 나라 언어와 친구를 사귀게 된 경험이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타지에서 사람과 사귀는 법을 알게 된 그는 인터넷을 통해 운명의 사랑을 찾는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믿음과 기운을 자산 삼아 질곡이었던 것들을 행복과 명예로 바꿔냈다. 이 책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난 자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