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 조디악의 정체를 파고들던 평범한 시민 로버트가 형사 데이빗을 찾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용의자 X와 첫 피살자 말린은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다. 한때 X가 살았던 집에서 말린의 집까진 50야드도 되지 않습니다.” 데이빗이 반문한다. “그걸 어떻게 알았죠?” 그러자 로버트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가 직접 두집 사이를 걸어봤거든요.”
<조디악>은 머리가 아니라 발을 믿는 영화다. 감독 데이비드 핀처는 다른 흔적엔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발자국만을 따라간다. 조롱하듯 신출귀몰하는 범인의 두줄 발자국이 아니라, 범인의 발자국을 따라 도처를 헤매는 사람들이 남긴 어지러운 발자국들을. 그중 어떤 발자국은 도중에서 불현듯 끊기고, 어떤 발자국은 점차 희미하게 사라져가지만, 또 어떤 발자국은 방향을 잃지 않고서 끝끝내 이어진다.
1969년 8월. 샌프란시스코의 신문사들에 ‘조디악’이라 자칭하는 연쇄살인범의 편지가 배달된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상술한 그 편지는 동봉한 암호문을 신문에 싣지 않으면 추가살인을 저지르겠다는 경고로 끝난다. 신문에 편지와 암호문이 공개되자 샌프란시스코 일대는 충격에 휩싸인다. 형사인 데이빗(마크 러팔로)과 빌(앤서니 에드워즈), 신문사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사건 기자 폴(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은 전력을 기울여 각각 사건 해결과 추리에 나선다. 그러나 가장 끈질지게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경찰도 기자도 아닌, 시사만평가 로버트(제이크 질렌홀)이다.
이 영화에 또렷하게 새겨진 것은 이제까지 걸어오던 방향과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한 데이비드 핀처의 발자국이다. 촬영의 교본으로 삼을 만한 <쎄븐>과 <패닉룸>에서 빼어난 영상 감각과 미학적 파괴력을 갖춘 <파이트 클럽>까지, 핀처의 영화에서 스타일은 언제나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나 올리버 스톤이었다면 훨씬 더 요란하게 연출했을 소재를 택하고도 전혀 흥분하지 않는 핀처는 이 영화에서 앨런 J. 파큘라의 <대통령의 사람들>(대통령의 음모??)을 떠올리게 하는 고전적 화술을 선보인다. 연쇄살인마를 다룬 영화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피냄새 밴 장르적 흥분이 이 영화엔 존재하지 않는다.
극중에 등장하는 살인사건 장면들은 작가 콜린 윌슨의 범죄에 대한 저작에서의 기술 방법처럼 냉정하고 사실적인 스케치로 섬뜩함을 안기고, 형사와 기자의 수사와 추리 장면들은 너무나 꼼꼼하고 세밀해 흡사 관객이 경찰서와 신문사의 회의석상에 참석하기라도 한 것 같은 생생함을 전한다. 그리고 로버트가 전면에 나서는 마지막 40분은 수사극이 지닐 수 있는 밀도와 긴장감의 극점을 보여준다. 방대한 내용을 효율적으로 요약한 편집과 2.35 대 1의 화면비율을 인상적인 패닝장면 등에서 제대로 활용한 촬영도 좋다.
<조디악>은 독립기념일을 맞아 폭죽이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발레호 시(市)의 까마득한 롱숏으로 시작해서, “이 사람이 제게 총을 쏜 사람이 맞다고 확신합니다”라고 증언하는 피해자의 클로즈업숏으로 끝난다. 수십년에 걸친 거대한 사건을 멀리서부터 포위망을 좁히듯 서서히 파고들어가 핵심이라고 믿는 부분에 단 하나의 또렷한 구두점을 힘차게 찍으며 끝나는 화술은 망원경과 현미경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면 어떤 영화적 쾌감을 도출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제이크 질렌홀과 마크 러팔로 같은 주연에서부터 클로에 셰비니와 존 캐럴 린치 같은 조연까지, 이 영화의 배우들이 이룬 성취도 대단하다.
끝내 범인이 잡히지 않은 실제 사건을 다룬 <조디악>은 이야기의 골격과 인물의 심리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몇몇 대사에서까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지만, 연출자가 소재에 대해 확보한 거리가 좀더 멀고 유머도 훨씬 차갑다. 실화 소재를 영화적으로 확실히 장악할 줄 아는 미국과 한국의 두 뛰어난 감독의 서로 다른 연출방식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독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