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관계를 가진 뒤 “행복해요”라고 고백하는 것은 여자다. 오르가슴을 경험한 뒤에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것도 여자다. 첫 섹스 뒤 찾아가서 “기분이 상했나요?”라고 분위기를 살피는 것도 여자고, “당신의 몸이 좋아요”라고 칭찬하는 것도 여자다. “나를 사랑해야만 해요”라고 명하는 것도, 관계를 이끄는 것도, 그리고 농장을 사주려는 것도 여자다.
그 여자가 먼저 나신을 드러내고, 남자에게도 알몸이 될 것을 요구한다. 등을 보인 채 옷을 벗고 불을 끄려는 남자에게 여자가 재차 요구한다. “돌아서요.” 그리고 돌아선 남자의 벗은 몸을 천천히 음미한다.
<레이디 채털리>는 여성감독이 만든 여자의 욕망과 자각에 대한 영화다. 연출 재능의 현격한 격차를 잠시 논외로 하고서, 프랑스 여성감독 파스칼 페랑이 만든 이 작품을 실비아 크리스텔이 주연하고 남성감독 쥐스트 자캉이 감독한 추억 속의 삼류 영화 <차타레 부인의 사랑>과 비교해보면 시선의 성별이 같은 내용을 얼마나 달라지게 하는지를 여실히 깨달을 수 있다.
20세기 최고 문제작 중 하나였던 D. H. 로렌스 소설을 옮긴 <레이디 채털리>는 촉각에 대한 영화다. 그 생생한 촉각이 가닿는 곳은 육체와 자연이다. 여자의 떨리는 손이 나무의 이끼를 만지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만지며 남자의 목덜미를 만질 때, 그녀는 몸을 발견하고 자연을 발견하며 삶을 발견한다.
여자는 몸을 발견한다. 전쟁터에서 부상해 하반신이 마비된 남편 클리포드(이폴리트 지라르도)와 조용한 삶을 살던 콘스탄스(마리나 핸즈)는 남편의 심부름으로 숲속 오두막을 찾았다가 사냥터지기 파킨(장 루이 쿨룩)의 벗은 등을 훔쳐보고서 강렬히 이끌린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거울 앞에서 벌거벗은 채 자신의 몸을 찬찬히 훑어본다. 그리고 그날 밤 앓아눕는다. 앓는다는 행위야말로 몸을 생생히 체험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그녀는 욕망의 대상과 주체를 연이어 확인한다.
여자는 자연을 발견한다. 이 영화는 파킨과의 육체적 관계에 빠져든 콘스탄스가 몸에 탐닉하는 과정을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과정과 병치한다. 둘의 관계는 콘스탄스가 병아리를 만질 때 파킨이 그녀의 몸을 만지면서 처음 시작되고, 폭우 속에서 함께 벌거벗고 장난치다가 진흙 위에서 몸을 섞을 때 극점에 도달한다. 섹스신 앞뒤에는 어김없이 콘스탄스가 숲속 길을 오가는 장면이 나온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시냇물이 굽이쳐 흐르며, 새들이 맘껏 지저귀는 숲은 살아 숨쉬는 자연의 욕망에 다름 아니다. 이 영화에서 오르가슴을 경험한 뒤 신기한 일을 겪은 아이처럼 입을 조금 벌리고 천진하게 쳐다보는 콘스탄스의 표정은 천둥 뒤 소나기를 쏟아내는 하늘을 올려다볼 때의 그녀 표정과 동일하다.
그리고 여자는 삶을 발견한다. 콘스탄스에게 결핍된 것은 섹스만이 아니었다. 부르주아적 세계관 속에서 철저히 똬리를 틀고 사는 클리포드는 대화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격렬하게 타오르는 육욕을 그리는 듯한 이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난다. 남편이 친구들과 나누는 전쟁 체험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첫 장면의 콘스탄스는 마지막 장면에서 삶 전체를 걸고 토해내는 말로 파킨과 절절하게 소통한다. “날 좋아하오? 그러면, 무슨 말이 더 필요있겠소”라며 곧바로 섹스에 몰입하곤 했던 과묵한 남자 파킨 역시 라스트신에 이르러 콘스탄스 앞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째로 쏟아내며 운명을 빚어낸다.
지난 2월 세자르영화상 5개 부문을 석권한 <레이디 채털리>에서 파스칼 페랑은 격정적인 내용과 단아한 형식을 멋지게 조화시켰다. 촬영은 안정적이고 우아하며, 편집은 고전적 향취를 풍긴다. 아, 그리고 그 까치발! 처음 오두막을 찾아간 콘스탄스가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발뒤꿈치를 깡총 들었던 짧은 클로즈업을 아마도 나는 한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