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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동자 소녀의 좌절된 로맨스, <금발 소녀의 사랑>

EBS 6월23일(토) 밤11시

<금발 소녀의 사랑>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아마데우스>(1984), <래리 플린트>(1996), <맨 온 더 문>(1998) 등으로 유명한 밀로스 포먼의 초기작에 속한다. 뒤의 작품들이 할리우드로 정치정 망명을 떠난 뒤 만들어졌다면, <금발 소녀의 사랑>은 체코 뉴웨이브의 대표작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어느 노동자 소녀의 좌절된 로맨스라고 부를 만한데, 포먼은 여기에 1960년대 체코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엮어 넣는다. 체제에 대한 비판을 개인의 욕망과 결부지어 보여주는 포먼 특유의 방식은 이 초기작에서도 두드러진다.

금발머리 처녀 안둘라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그녀는 동료들과 무도회장을 찾고 남자들을 만나지만,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안둘라는 젊은 피아니스트 밀다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는 그녀만의 백일몽이었을 뿐, 현실은 무정하기만 하다. 영화는 공장 노동자와 피아니스트라는, 서로 다른 계급의 불가능한 사랑을 뼈대로 당대 체코의 사회 풍경을 보여준다. 비전문 배우의 즉흥연기가 돋보이는 이 작품에서 포먼은 출구도, 꿈도 없어 보이는 한 여성 노동자의 무표정한 일상에 희극적인 순간들을 삽입한다. 이를테면 안둘라와 밀다의 첫 섹스 장면이나 무도회장에서 안둘라를 유혹하려는 어느 유부남의 천박한 행각은 영화 자체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의 기계적인 일상에 유머러스한 틈을 만들어준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밀다의 침대를 차지한 안둘라 때문에, 비좁은 침대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밀다와 그의 부모가 티격태격 싸우는 장면이다. 이때 안둘라는 문밖에서 이들의 말다툼을 엿듣고 있는데, 그 상황 자체는 한편의 독특한 코미디지만, 카메라는 문밖에서 서럽게 흐느끼는 안둘라에게서 멈춘다. 이 장면은 <금발 소녀의 사랑> 전체를 압축한 상징적인 장면으로서, 영화는 코미디처럼 보일 정도로 부조리한 일상에서 삶의 냉정함과 단절의 상처를 길어내고 있다. <금발 소녀의 사랑>은 68년 소련의 체코 침공 이후 만들어진 <소방수의 무도회>의 초석이 된 작품이자, 포먼의 할리우드 진출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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