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너머의 얼굴이 <아홉살 인생> <여선생 vs 여제자>의 새침데기 이세영이라는 것을 처음엔 좀처럼 알아보기 힘들다. 이 배우는 미디어가 만든 깍쟁이 아역배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신의 나이와 실존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쳐주었다. 전교 일등이거나 불안에 온통 투신하는 완전 날라리가 아닌 이상, 어디에나 있지만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감없는 소녀가 바로 수아다.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뒤, 이상하게도 수아는 슬픔보다는 환상을 키운다. 바로 유명 가수 윤설영이 자신의 진짜 엄마라는 것. 투명한 오르골 소리와 함께하는 마술도 있다. 환상과 마술은 소녀가 사는 무채색의 세계에 원색의 생생함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환상적 세계 속에서의 수아의 웃음엔 소리가 없다. 처음에 환상은 수아가 자신을 부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수아는 현실을 떠나, 진짜 ‘엄마’를 찾아 기차를 타고 떠난다. 성장이란 그러나 아버지의 말이, 그리고 그로 인해 자라난 환상이 깨어지는 자리에서 생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버지의 말과 수아의 환상이 본질적으로는 진실 위에 놓여 있음을 긍정한다. 현실적으로 조율된 엄마에 대한 환상을 받아들이면서, 아버지의 슬픈 진심과 이별해야 하는 나이, 수아는 그때 열세살이다. 수아의 손에 발린 분홍빛 매니큐어처럼, 소박한 수아의 일상에 비해 환상은 좀처럼 구색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물 버스가 노란 식당버스로 변신한 것처럼 마법은 현실 속에서도 간절함을 이루어준다. 노란 버스가 청보리밭 옆을 지나가는 장면은 수아가 현실과 악수하며 멋지게 과거와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인상적 순간을 포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