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으로 이미 명성을 얻었던 오슨 웰스가 할리우드로 넘어왔을 때 영화사에서는 “천재가 작업을 시작했다”고 홍보했다. 아마도 웰스라는 인물을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천재’라는 것일 터이다. 그 밖에 그에 대한 기술로는 혁신을 창작의 동력으로 삼는 영화감독, 영화적 미로의 건축가, 역동적 영화의 창조자, 셰익스피어에 대한 창의적 집착을 가진 인물, 중세적 심성의 소유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웰스에 대한 책(<오슨 웰스의 발견>)을 낸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독립영화인, 지식인으로서 웰스의 면모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밖에 더 이야기할 것은 없을까? 웰스는 “영화는 항상 무언가의 발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문장에서 영화라는 단어를 웰스로 대체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발견의 자리는 서울에서도 이어진다(서울아트시네마, 6월1~5일, 6월12~20일).
위대한 앰버슨가 The Magnificent Ambersons, 1942년, 흑백, 88분 기념비적인 데뷔작 <시민 케인>을 만들고 난 다음에 오슨 웰스는 다음 작품으로 부스 타킹턴의 퓰리처상 수상작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한다. 산업화가 도래하면서 몰락을 겪게 되는 한 귀족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 <위대한 앰버슨가>는 웰스의 고전주의적 기질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앙드레 바쟁 같은 평자에게 스타일상의 혁신으로 인해 격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수아 트뤼포 식으로 이야기하면 형식의 과시주의자가 찍고 검열당국이 편집한 듯한 인상을 주는 이 영화는 온전한 웰스의 영화라고 보긴 어려운 면이 있다. 스튜디오쪽에서 러닝타임도 대폭 축소했고 결말도 새로운 장면으로 교체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위대한 앰버슨가>는 진정으로 저주받은 영화라 불린다.
상하이에서 온 여인 The Lady from Shanhai, 1947년, 87분 데뷔작 <시민 케인>에서부터 웰스는 필름 누아르의 취향을 보여주었는데 <상하이에서 온 여인>은 그의 ‘본격적인’ 필름 누아르로서 대표작에 꼽히는 작품이다. 영화는 아일랜드계 선원인 마이클 오하라가 미모의 여인 엘자가 쳐놓은 계략에 걸려드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하이에서 온 여인>을 두고 앙드레 바쟁은 웰스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의미가 풍부한 작품이라고 했지만 개봉 당시 관객에게는 난처함을 안겨주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우선 이야기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유의 것이어서 컬럼비아사의 사장 해리 콘이 자기에게 영화의 이야기를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1천달러를 주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여기서 웰스가 자신의 영화적 재능을 마음대로 활용하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도 관객에게 부담요소가 된 듯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지날수록 그 매혹이 짙어가는 영화가 <상하이에서 온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카딘씨 Mr. Arkadin, 1955년, 흑백, 99분 결점을 가진 천재라는 웰스적 영웅이 등장하고 조사의 내러티브 형식을 취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아카딘씨>는 어느 정도의 타협이 눈에 띄면서도 지극히 웰스적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재력가인 아카딘이 스트래튼이란 젊은이에게 과거를 잊어버렸다며 의혹에 쌓인 자신의 과거를 조사해달라는 임무를 맡기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카딘씨>는 서정성과 창의성을 함께 가지고 있어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란 말이 꼭 들어맞는 작품이지만 웰스의 다른 많은 영화들처럼 자국인들에게는 무시당하고 오히려 유럽인들에게 환대받았던 영화였다. 1950년대 중반에 <카이에 뒤 시네마>는 가장 뛰어난 12편의 영화 가운데 하나로 이 영화를 꼽은 바 있다.
심판 The Trial, 1962년, 흑백, 120분 웰스는 <심판>에 대해 원작자인 카프카와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작품을 영화로 만들면서 그저 해석자로 남기보다는 ‘작가’로서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영화 <심판>이 웰스의 작품이라는 것은 우선 주인공 K를 결백하지만은 않은 인물로 그렸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또한 비주얼의 설계라는 면에서 웰스는 카프카에 대해서 반대 지점에 있다고 할 만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심판>이 보는 이들을 매혹게 하는 것은, 그려놓은 그림자, 폐쇄적인 방, 빛과 어둠, 클로즈업, 사각(斜角) 앵글의 숏 등을 활용해 여기서 웰스가 악몽의 비주얼을 제대로 창조해냈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예산상의 여러 난관을 뚫고 만들어진 또 하나의 웰스의 영화이기도 한데 배우와 스탭 인건비를 웰스 자신의 주머니에게 꺼내줬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심야의 종소리 Chimes at Midnight, 1966년, 흑백, 115분 웰스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며 자라났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심야의 종소리>는 그런 셰익스피어의 탁월한 해석가가 만들어낸 뛰어난 셰익스피어 영화다. 여기서 웰스는 <리처드 2세> <헨리 4세> 등 셰익스피어의 희곡 여러 편을 자기 식으로 뒤섞어 이야기를 구성했다. 영화는 웰스가 연기한 폴스타프라는 인물, 그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심야의 종소리>는 그럼으로써 웰스 자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웰스와 셰익스피어의 융합을 빼어나게 수행해낸 영화로 웰스 스스로도 자신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꼽는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