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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기계의 반란

<터미네이터>의 디스토피아 속 진화하는 기계의 욕망

주지사 일로 바쁜지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터미네이터> 4편에는 출연하지 않기로 했단다. 듣자하니 4편에서는 존 코너가 저항군을 이끌고 기계부대와 일전을 벌인단다. 근육질 배우가 빠진 영화의 미래가 적이 걱정되지만, 할리우드영화의 문법상 어차피 최후의 승리는 인간의 것으로 끝날 터이니 인류의 미래에 대해선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펼쳐지는 황량한 상황은 발터 베냐민이 쓴 그 유명한 논문의 추기를 연상시킨다. 거기에는 마리네티의 미래파 선언문이 인용되어 있다.

기계화와 가속화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방독면, 화염방사기와 소형탱크 등을 빌려 버림받은 기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굳건히 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오래 꿈꾸어온 인간 육체의 금속화 과정의 시대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총탄의 포화와 대포의 폭음, 사격 뒤의 휴식, 향기와 썩는 냄새 등을 합해 교향곡을 만들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대형탱크, 기하학적 비행편대, 불타는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나선형의 연기와 같은 새로운 건축구조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미래파들이 파시즘의 품으로 달려간 것은, 이렇게 전쟁을 예술의 연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해괴해도 미래주의 역시 예술적 모더니즘의 한 흐름이라는 사실. 전통적 감성이 생명있는 유기체를 사랑한다면, 현대적 감성은 생명없는 무기체를 긍정한다. 전통적 감성이 자연물을 모방한다면, 현대적 감성은 인공물을 구축한다. 전통적인 감성은 인공적 환경에 반감을 느끼나, 현대적 감성은 외려 기계화와 가속화에서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지루한 일상은 그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기계화, 가속화의 금속성 욕망을 가장 화끈하게 만족시켜주는 것은 역시 전쟁. 이탈리아 미래파들은 이처럼 ‘미학적 이유’에서 전쟁의 예술성을 찬양하며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앞장섰다. 독일도 다르지 않다. 젊은 나치 당원의 상당수는 전쟁 전엔 아우토반의 폭주족이었다. 금속과 속도에 열광하던 이 젊은이들은 이후 자동차를 전차와 항공기로 갈아타고 속도의 화신인 ‘전격전’(電擊戰)의 기계로 변신한다.

신체의 금속화

마리네티는 전쟁이 “기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굳건히” 해준다고 말한다. 전폭기의 조종석에서라면 “인간 신체의 금속화”가 선사해주는 쾌감을 맘껏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맥루언의 말대로, 금속과 결합한 신체는 유기체들의 머리 위로 폭탄을 쏟아 붓고, 그 파편들이 유기체를 갈가리 찢어놓는 것을 보며 모든 생명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의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통해 역설적으로 항변한 것처럼, 모든 것을 파편으로 해체하는 큐비즘의 미학은 이때 글자 그대로 현실이 된다.

<지옥의 묵시록>의 유명한 장면을 생각해보자. 바그너의 <발퀴레>를 틀어놓고 미군 헬기가 전쟁의 신처럼 날아다니며 베트남인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한다. 전쟁이 “꽃피는 초원을 기관총의 열대식물로서 더 한층 다채롭게 만들어”주고, “총탄의 포화와 대포의 폭음으로 교향곡을 만들어”낸다던 마리네티의 생각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신체의 금속화”가 주는 이 쾌감은 물론 그 밑에서 기총소사를 받는 가련한 유기체들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피카소의 또 다른 작품이 있다. 그런데 그 작품의 배경은 불행히도 한국.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피카소는 화면의 한쪽에 벌거벗은 신체들을 세워놓고, 다른 쪽에는 그 유기체들을 향해 총구를 겨눈 전쟁기계들을 배치한다. 듣자하니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신천리 지역에서 벌어졌던 미군의 양민학살을 다룬 것이라고 한다. 학살의 참상을 이 위대한 화가는 유기체와 무기체, 따뜻한 신체와 차가운 금속의 대립으로 표현해놓은 것이다.

누가 결정하는가

마리네티는 “기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말하나, 베냐민은 그것을 “기술의 반란”이라 부른다. “강의 흐름이 나아갈 운하를 파는 대신 기술은 인간의 흐름을 전쟁의 참호 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고, 비행기를 통해 씨를 뿌리는 대신 화염폭탄을 도시에 뿌리고 있다.” 인간이 만든 기술이 외려 인간을 절멸한다. <터미네이터>는 이 역설의 SF 버전이다. 거기서 기술의 반란은 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에서 정작 흥미로운 것은 어쩌다 그런 사태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설명하는 대목이다.

폴 비릴리오는 미디어의 발전이 ‘공간의 정치’를 ‘시간의 정치’로 바꾸어놓았다고 말한다. 영화 <트로이>에서 보듯이 과거의 전쟁은 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성전(攻城戰)이었다. 1차대전만 해도 플랑드르의 기다란 참호로 연상되는 전선이 존재했다. 하지만 2차대전에서 독일은 전차와 항공기를 이용한 전격적으로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전쟁은 공간적인 것에서 시간적인 것으로 변했다. 전쟁은 그 뒤로도 계속 가속화하여 오늘날 거의 전기적 속도에 도달했다.

예를 들어 미·소 냉전 중 소련에서 발사된 미사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결정하는 데에 미국에 허용된 시간은 단 8분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정상들은 외유할 때 늘 핵가방을 들고 다녀야 한다. 케네디가 쿠바에 소련의 핵미사일 기지가 설치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이 경우 미국에 주어진 시간이 단 2분으로 단축되기 때문이다. 발사된 것이 핵미사일인지, 재래식 미사일인지, 핵이라면 전술핵인지 혹은 전략핵인지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인간의 머리로 단 몇분 안에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결정을 기계에 맡겨놓으면 어떨까? 미디어가 신체의 확장이라면, 컴퓨터는 인간 두뇌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컴퓨터는 인간의 자연적 두뇌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속도로 수많은 연산을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 그러니 인류 전체의 운명이 걸린 결정을 대통령이라는 인간의 두뇌에 맡겨두느니, 차라리 컴퓨터에 맡겨놓는 것이 인류의 생존을 위해 더 안전하지 않겠는가.

기계의 욕망

<터미네이터>에서 미래의 디스토피아는 애초에 핵미사일의 발사 여부를 기계에 맡겨놓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설정된다. 판단을 기계에 맡겨놓은 인간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기계 역시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악의를 가진 기계들은 서로 상대국을 향해 핵미사일을 발사하여 인류를 절멸하고, 마지막 생존자까지 ‘터미네이트’하려 든다. 그런 의미에서 <터미네이터>는 미·소 냉전시대에 핵전쟁과 관련한 시간의 압박이 초래하는 불안감을 반영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기계가 유기체처럼 욕망을 가질 수 있냐고? 기계의 발전은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지나, 생물의 진화는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가타리던가? 그는 기계를 바라보는 생물학적 관점을 제시한 적이 있다. 실제로 가끔 기계도 생물처럼 진화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인간의 여러 감각을 대신하는 각종 센서들. 건물의 자동문과 공장의 로봇 손들. 도처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내는 기계들. 날로 발전하는 자동제어와 인공지능. 따로따로 개발되는 이 모든 기술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로 합쳐진다고 생각해보라.

인간의 형상을 닮은 휴머노이드만 로봇이 아니다.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이 전혀 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계들은 독립된 의지와 욕망을 가진 인격이 되기 위해 스스로 진화하고 있다. 그들이라고 언젠가 욕망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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