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양조위 예찬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돼야 한다.” 배우 인터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인데 배우에겐 연기 테크닉보다 인간적 수련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 게다.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말이지만 가끔 얼마나 맞는 얘기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사생활의 영역에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평을 듣지 못하는 사람도 좋은 배우로 평가받는 사례를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선 반대 사례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성격적 결함이나 정신적 상처가 예술가의 동력이 되는 경우 말이다. 확실히 인간성 좋은 순서대로 좋은 배우로 평가받는 것은 아닐 텐데 가끔은 그럴지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최근엔 <상성: 상처받은 도시>(이하 <상성>)의 양조위를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품이 배어나는 그의 눈빛은 아무리 봐도 연기 테크닉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양조위의 선한 본성은 카메라에 포착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상성>은 <무간도>만큼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양조위를 만나는 순간만은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상성>은 <무간도>와 마찬가지로 무간지옥을 헤매는 남자의 이야기다. 고뇌하는 남자로 누가 나오느냐에 따라 영화의 톤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상성>의 양조위는 달리 설명하지 않아도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후반부는 자신이 택한 어떤 악행의 결과를 바라보는 양조위의 눈빛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럴 때 배우가 감당할 몫은 연기 변신 같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번호에 실린 제작진 인터뷰에 따르면 원래 이 역할은 양조위의 것이 아니었는데 대안을 찾지 못해 양조위가 하게 됐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나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조위가 아니라면 한순간에 밀어닥치는 후회와 번민을 눈빛만으로 어떻게 보여주겠나 싶어서다.

영화비평에서는 언제나 영화의 주인이 감독이라고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면 특정 배우가 보고 싶어 극장에 가는 사람이 훨씬 많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풋풋함과 신선한 외모의 아이돌 스타를 보고 싶어서 또는 재치와 유머로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코믹한 배우를 보고 싶어서 영화 보러 가는 사람이 공부하는 심정으로 특정 감독의 신작을 부지런히 챙겨 보는 사람보다 많을 것이다. 그럴 때 양조위 같은 배우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물론 양조위야말로 섹시하다고 말하는 여성팬도 많겠지만 섹시함이 양조위를 설명하는 데 적당한 단어는 아닐 것 같다. 나는 양조위가 삶의 비애를 알면서도 맑고 투명한 무언가를 잃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배우여서 자꾸 마음이 끌린다. <비정성시>에서 <상성>까지 양조위는 참 변함없다. 신기할 정도로 늙지 않는 그는 20대에 간직했던 맑은 빛이 그대로다. 세월의 풍파에도 사라지지 않는 그 빛은 양조위의 연기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피부가 탱탱한 것이라면 보톡스를 맞아서 그런가, 할 수도 있지만 보톡스로 젊은 시절의 눈빛도 재생시킨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아직 저렇게 선한 표정을 간직할 수 있나 싶다.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돼야 한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얼굴에 세월이 새겨지는 나이가 될 때, 그때도 변함없을 무언가를 지키는 것은 연기와 삶이 괴리된 채로는 이뤄질 수 없으리라. 세파에 닳지 않는 양조위가 부럽다. 영화에서라도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건 위안이 되는 일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