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영화의 현재적 지평을 열어줄 EU영화제가 오는 5월25일부터 31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젊은 영화작가들이 그려낸 동시대의 유럽영화를 대체적으로 아우르는 것은 환상보다는 현실, 슬픈 표상들에 압도된 온기없는 리얼리즘의 경향이다. 다양한 연합국의 문화적 차이는, 유로화라는 화폐 보편성을 기반으로 실직과 중독, 부채와 저당, 불운과 고독이라는 보편성의 전체를 구성한다. 이들의 삶을 위무하는 것은 달콤하고 낙관적인 환상이 아니다. 알코올과 항우울제, 마약, 혹은 이유없는 우발적 살인이 영화적 현실의 요소로 편입되었다. 오랜 유럽 불황의 그림자가 배어 있는 영화들의 페이소스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지적 자의식 없이 명랑함으로 충만한 영화 <얄라 얄라>(스웨덴)를 추천한다. 사랑마저 행복한 전망을 전해주지 못하는 동시대 유럽의 삶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욕망을 긍정하는 ‘케세라세라’의 천진난만함도 큰 힘이 될 것이다. 따스한 시선의 개막작 <꿈의 동지들>(독일)과 <내가 원하는 삶>(이탈리아)은 영화의 현실의 상호관계를 보여주며, 마이클 윈터보텀의 2002년 화제작 <24시간 파티 피플>(영국)도 유쾌하게 랑데부할 수 있다. EU영화제는 그리스를 비롯해 핀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색다른 문화권 영화와의 접점을 마련해주는 동시에 변화하는 유럽의 현재가 반영된 복잡한 모자이크 문양을 제공해줄 것이다.
<꿈의 동지들> Leinwandfieber 개막작인 <꿈의 동지들>은 영화와 삶의 씨실과 날실이 엮여 만들어진 흐뭇하고 애정어린 다큐멘터리다. 영화라는 이상동몽(異床同夢)에 빠진 인도 남부, 부르키나파소, 북한, 미국 중서부의 영사기사들과 그들의 이웃들, 영화를 사랑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 밀착한 이 영화는, 영화라는 꿈을 영사하는 현실에 대한 영화이자, 여러 겹의 꿈 혹은 여러 겹의 현실에 대한 영화다. 삶과 공동체, 민족과 이념, 고독과 환대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꿈의 동지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당신까지 ‘동지’로 불러들인다.
<우조 한잔 하러 갈까요?> Pame Gia Ena Ouzo 실직자 소피아는 택시 운전을 하던 중 옛 친구 엘레니를 만난다. 이혼한 뒤 TV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엘레니에겐 육아보다 직업이 더 중요하다. 두 친구는 이해와 갈등을 넘나들며 점차 성숙한 삶의 경지에 이르러 간다. 소피아의 꿈(환상)과 엘레니의 뉴스 화면(현실)을 통해 살짝살짝 부상하는 실직과 전쟁의 문제로 현실의 환부를 아우르는 넓은 시선을 보여주는 영화. 강렬한 지중해의 햇빛 아래서 촬영한 아름다운 화면과 달콤하게 삶의 환부를 건드리는 음악이 관전 포인트.
<얄라 얄라> Jalla! Jalla! 공원 잡역부로 일하는 몬스와 로로는 절친한 친구 사이. 근육질의 몬스는 발기부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섹스숍을 드나들거나 아랍계 민간신앙에 의탁하며 안간힘을 쓴다. 아랍계인 로로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으나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닌 가족의 요구로 아랍계인 야스민과 결혼해야 하는 처지다. 어쩔 수 없이 계약결혼을 하기로 하지만 치밀하지 못한 이들에게 만사가 형통할 리 없다. 두 친구의 결혼과 섹스를 둘러싼 유쾌한 소동은, 삶을 사는 근본적인 가벼움, 그러나 깊이있는 가벼움을 보여준다.
<얼어붙은 땅> Paha maa 이 영화는 모두가 자신의 지옥을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톨스토이적 질문으로 시작해 이를 다종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연쇄적으로 엮어나간다. 실직과 알코올, 약물과 항우울제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의 삶에 촘촘히 연루되어 있다. 이들은 늘 궁핍으로 뭔가를 저당잡히고, 한 사람의 불행은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전파되어 파급된다. 사소하게 시작한 사건은 점차 심각하고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해가며 모두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삶이 지옥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잘될 것임을 믿으라 한다. 달리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