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렉’(shrek)이라는 제목을 듣고 떠오른 것은 ‘공포’와 ‘경악’이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Schreck). 실제로 독일어와 히브리어가 섞인 유대인의 언어 ‘이디슈’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슈렉>은 <미녀와 야수> 같은 동화의 전형성을 파괴한다.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는 놀라운(?) 반전이 말해주는 것은 한마디로 ‘생긴 그대로 자신을 긍정하라’는 것. 너무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 메시지가 <슈렉>이 인기를 끄는 비결은 아닐 것이다.
<슈렉>이라는 메타텍스트
<슈렉>에는 일화가 따라다닌다. 가령 파콰드 영주의 얼굴이 디즈니사의 사장을 닮았으며, 그가 사는 성(城)은 디즈니랜드를 패러디한 것이다. 실제로 드림웍스의 설립자 제프리 카젠버그는 디즈니사에서 떨어져 나오는 과정에서 그들과 법적분쟁까지 겪었단다. 그래서 디즈니사에 복수하려 <슈렉>을 만들었다는 얘기까지 떠도나, 이 설의 진위에 관계없이 <슈렉>이 애니메이션의 영역에서 디즈니의 아성을 크게 흔들어놓은 것만은 사실이다.
<슈렉>의 매력은 난무하는 패러디에 있다. 가령 피오나 공주가 너무 높은 피치로 노래하다가 새를 죽게 하는 장면은, 디즈니 만화 <백설공주>를, 침실에 걸린 파콰드 영주의 초상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그리고 피오나 공주가 공중의 정지상태에서 상대를 때려눕히는 것은 <매트릭스>를 패러디한 것이다. <슈렉>은 포스트모던하다. 그것은 문학, 영화, 고전회화, 대중음악 등 다양한 원천에서 인용을 끌어오는 패스티시의 전략을 따른다. 슈렉은 일종의 메타텍스트다.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백설공주> <라푼젤> 등 기존의 내러티브들은 해체되고, 여기서 풀려나온 인물들은 이 영화에서 새로운 플롯 속으로 짜여 들어간다. 그리하여 문화적 코드를 많이 이해할수록 영화의 조크를 더 많이 해독할 수 있을 것이나, 동시에 굳이 그런 배경지식이 없어도 영화를 즐기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어른과 아이를 막론한 보편적 인기는 이 이중코드의 전략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슈렉>의 가장 큰 매력, 하이퍼리얼
하지만 <슈렉>의 가장 큰 매력은 그래픽의 사실성에 있다. 이 영화를 본 눈에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지극히 평범하게 보일 정도다. 예를 들어 드림웍스의 애니메이터들은 슈렉의 몸을 900개의 근육으로 움직이고, 그중 218개의 근육을 얼굴에 배치하여 표정의 자연스러움을 극대화했다. 그런가 하면 슈렉의 손가락 끝에 지문까지 그려 넣고, 눈동자에 빛의 굴절을 주어 정말로 상대를 응시하는 수정체를 가진 진짜 눈의 깊이를 주었다.
초기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로봇, 곤충, 장난감이거나 대머리여야 했다. 용량의 한계가 디지털 애니메이션에서는 금속이나 플라스틱의 매끈한 질감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렉>은 이 한계를 가볍게 넘어선다. 머리카락은 사실적으로 찰랑거리고, 동키의 털은 정말로 포유류의 모피를 보는 듯하다. <슈렉>의 인물들이 유난히 머리카락을 찰랑거리고, 동키가 유난히 방정맞게 움직이는 것은 제작자들의 기술적 자부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하이퍼리얼한 묘사는 캐릭터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슈렉>의 애니메이터들은 영화의 배경에 2만8천 그루의 나무를 심어놓고, 30억개의 나뭇잎의 움직임을 묘사했다. 그런가 하면 이른바 ‘바운스 셰이더’(bounce shader)로 사물이 표면의 빛을 주변으로 반사하는 자연광 효과를 재현하고, 서브서피스 스캐터링(subsufface scattering)으로 표면에 비친 빛을 흡수하여 피부를 자연스럽게 보이게 했다. 이 디지털 카라바조 실험 역시 이들이 자랑하는 기술 중 하나다.
두 갈래의 길
하지만 CG로 아날로그 현실을 방불케 하는 환영효과를 내는 게 과연 가능할까? <디지털 모자이크>의 저자 스티븐 홀츠먼에 따르면, “실재 세계와 질적으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시뮬레이션을 만들려면 초당 85프레임, 100만 x 100만 픽셀의 해상도, 픽셀당 1600만 컬러, 좌우 235도, 상하 100도의 시각영역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마디로 하나의 이미지에 8억개의 개별표면이 필요하다는 얘기. 기술적으로 아직 요원한 일이다.
여기서 CG는 두 갈래 길 앞에 서게 된다. 하나는 디지털 기술로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길이다. 생생한 환영효과를 추구하는 CG 기술자와 예술가들은 기술의 발전으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가 점점 좁아져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질 거라 믿는다. 반면, 다른 이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가 원리적인 것이어서 기술의 발전으로 좁혀질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들은 그 한계를 인정하고 아예 아날로그와 구별되는 디지털의 고유성을 찾아나가려 한다.
이 두길이 서로 배척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컴퓨터게임의 CG에서는 이 둘이 적절히 배합된다. 가령 상황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컷신’(cut scene)은 실물을 방불케 하는 고해상의 자연주의적 환영으로 제시된다. 반면 게임 안의 상황은 다이어그램 수준의 이미저리(imagery)로 처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영효과가 아니라 반응속도다. 반면, 영화의 CGI는 고해상을 지향한다. 그것은 관객과 인터랙티비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디지털 모자이크
<슈렉>이 고해상을 자랑하는 것은 극장용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은 원래 정세도가 낮은 쿨 미디어(cool media)로, 윤곽과 색채와 동작을 단순화함으로써 관객에게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는 모자이크적 매체다. 그렇게 생략된 정보를 관객이 정신으로 보충해가며 보는 게 또한 애니메이션의 묘미다. 실물을 방불케 하는 생생함을 추구할 거라면, 차라리 현실의 공간에 인간 배우를 데려다놓고 찍는 게 낫지 않은가.
맥루언은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쿨미디어인 TV에 적합한 장르라고 말했다. 가령 최초의 ‘TV아니메’를 만든 유지 구리의 실험적 작품은 극도의 저해상을 지향한다. 물론 극장 애니메이션에 8분의 1 해상도를 가진 TV아니메의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슈렉>은 애니메이션영화를 표방한다. 그것은 실사영화와 구별되는 애니메이션의 쿨(cool)한 성격을 인정하겠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굳이 뜨거운(hot) 하이퍼리얼의 효과를 강조하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슈렉>의 이미저리가 ‘포토 리얼’한 것은 아니다. 물론 녹색 괴물은 동작과 표정의 자연스러움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특히 당나귀 동키의 캐릭터는 에디 머피의 탁월한 목소리 연기와 더불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하지만 정작 인간인 피오나 공주는 어딘지 많이 딱딱하게 느껴진다. 한마디로, 캐릭터가 인간 종(種)에 가까울수록 사실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셈이다.
슈렉은 차갑다
<슈렉>의 하이퍼리얼리티는 동물과 괴물에서 두드러진다. 동물과 괴물은 전통적인 저해상 애니메이션의 제재다. 아무리 생생해도 디지털이 현실만큼 뜨거울 수는 없다. 그 생생하다는 동키의 모피 효과도 털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모두 시뮬레이션한 게 아니라 수많은 투명 플레이트를 겹쳐서 연출한 트릭에 불과할 게다. 하긴, 실사를 방불케 할 정도로 뜨거운 애니메이션은 더이상 애니메이션이 아닐 것이다.
관객의 경탄은 혹시 그 정도의 ‘뜨거운’ 효과를 (애니메이션이라는) ‘차가운’ 매체로 연출했다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실물 같지 않은 캐리커처가 실물처럼 움직인다. 차가운 캐릭터가 뜨겁게 행동한다. 어떻게 보면 매체성의 배반이나, 어차피 <슈렉>의 매력은 차가움과 뜨거움의 이 모순적 결합에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