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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거미인간, 한국영화 위기의 모든 면을 보여주다
김민경 2007-05-15

와이드 릴리즈, 스크린쿼터 축소, 관객 성향 변화 등 다각도로 드러나고 총합된 위기의 모습들

2007년 할리우드 여름 블록버스터 상륙의 첫 신호탄은 예상보다 요란했다. 첫주부터 <스파이더맨 3>는 역대 외화 사상 가장 높은 개봉 성적인 256만명(배급사 집계)을 기록하며 파죽지세의 선전을 계속하고 있다. 어린이날인 지난 5월5일엔 전국 82만명이 들어 일일 관객 동원 기록을 경신했고 현재 누적관람객 수도 300만명을 가뿐하게 넘어섰다. 특히 지난 주말 전국 1800여개 스크린 중 816개(배급사 집계)가 <스파이더맨 3>를 걸었다는 소식이 충무로에 던진 충격은 상당했다. 개봉 2주차를 지나며 스크린 수는 600여개로 줄었지만 여전히 스크린 점유율은 절대적이다. <스파이더맨 3>의 이상 독주 현상을 두고 한국 영화계는 갑론을박을 주고받는 중이다. 인터넷상에는 할리우드 콘텐츠의 내적 우수성을 내세워 한국영화의 안이함을 질책하는 의견이 쏟아진다. 일부 영화인과 언론은 스크린 독과점 규제안의 당위성을 다시 거론하는가 하면 한국영화의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내부의 목소리도 높다. 스크린쿼터시민연대는 이번 사태의 배경을 두고 73일로 반토막난 스크린쿼터 축소의 여파를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 3> 현상에 내포된 함의는 좀더 복잡해 보인다. 영화인들은 <스파이더맨 3>는 그동안 수면 아래 있던 한국영화의 제반 문제점을 일거에 노출한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스파이더 맨의 거미줄엔 지속적으로 제기돼온 와이드 릴리즈 배급 문제, 스크린쿼터 문제, 나아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는 한국 영화산업의 침체 경향 등이 모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독점 제한은 대안이 될 수 있나?

먼저 지난 주말 이후 <스파이더맨 3>의 극장가 점령 보도가 쏟아지며 가장 먼저 논쟁의 도마에 오른 것은 지난 여름 <괴물>을 계기로 불거진 스크린 독과점 이슈다. 지난해 11월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 주도로 발의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멀티플렉스에 대한 별도의 정의 및 관리 규정 신설 △대안상영관 설치(멀티플렉스 내 대안상영관 의무 설치 여부는 추후 결정) △한 멀티플렉스 내 특정 영화의 스크린 점유율 상한선 설치(민노당안은 30% 내외)가 골자로, 쏠림 현상으로 왜곡되기 쉬운 배급시장에 보완 장치를 마련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블록버스터 본산지인 미국에서도 한 영화가 15%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영화시장은 멀티플렉스의 제한없는 편중 상영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스파이더맨 3>를 계기로 일부 영화인들과 주요 포털사이트 토론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규제안 논의는 “억지스런 반시장적 조치”와 “다양성 확보를 위한 공공적 개입”이란 대립구도를 반복하며 명분 싸움에 머무르는 실정이다. 게다가 다양한 영화가 스크린을 점할 기회를 만든다는 긍정적인 취지에도 불구하고, 실효성 여부를 따져보면 의견은 좀더 부정적인 쪽으로 모인다. 영화진흥위원회 김미현 영상산업팀장은 30% 상한선 조치가 시행되면 독점이 과점으로 바뀔 뿐이라고 진단한다. “수익을 내야 하는 극장으로선 20%, 25%를 차지할 2, 3위 영화에 30%씩를 내주며 최대한 안정적인 수입을 도모할 것이다. 나머지 5%, 10% 영화들에 더 많은 파이를 할당할 리 만무하다.” 유력한 상업영화들이 결국 90%를 나눠 갖는 구도가 형성될 뿐 실제로 문화 다양성을 확장하는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효성을 차치해도 규제안에 내재한 위헌 소지도 부정하기 힘들다. 일부에선 안이 국회에서 통과된다 해도 위헌 소송 과정의 역풍이 우려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천영세 의원안에 대한 입장 차에도, 이번 800여개 스크린 독식 현상은 비정상적인 배급 환경을 증명한다는 데엔 영화계의 공감대가 분명해 보인다. <스파이더맨 3>로 다시 촉발된 독과점 이슈는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돼온 와이드 릴리즈의 폐해와 뿌리깊은 배급 구조의 심각성을 환기하고 있다.

스크린쿼터 축소 영향이 드러나는 것인가?

스크린쿼터 축소의 잠재적 영향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위기감도 높아지고 있다. 영화인들은 <그놈 목소리>(누적관객 324만5857명), <1번가의 기적>(누적관객 274만명) 외엔 다수의 한국영화가 관객동원 30만~40만명선의 낮은 성적을 보인 올해, 처음으로 스크린 점유율 30%선을 넘은 영화가 <스파이더맨 3>라는 상징적 의미에 주목한다. 5월9일 열린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 한국 영화산업의 변화’ 세미나에서 문화침략 저지 및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는 146일에서 73일로 줄어든 쿼터 축소분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73일의 상영일 기준은 극장으로선 지키기 부담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장동찬 영화제작자협회 사무처장는 “한국 영화산업이 가장 열악한 상황이었던 80년 초만 해도 한국영화 상영일수 15%선은 항상 유지됐다. 지금의 20%로는 스크린쿼터 본래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다”고 경험적 근거를 들었다. 쿼터 축소로 극장들이 <스파이더맨 3>의 압도적인 스크린 확장에 부담을 덜게 됐다는 영화계의 분석은 타당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스파이더맨 3> 독식 현상의 원인을 쿼터 축소에만 전가하는 논리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오기민 아이필름 대표는 스크린쿼터 축소의 부정적 영향에 공감하면서도 쿼터 축소가 사태의 근원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쿼터 때문에 한국영화가 많이 걸리고 쿼터가 없어서 외화가 많이 걸리는 게 아니다. 원인은 한국 영화산업의 위축이라는 제반 환경에서 찾아야 한다.” 2002년 이후 한국영화 실제 상영일수가 140~170일 수준으로 유지돼왔던 호시절에 비해, 올해 한국영화에 마땅한 대항마가 없는 상황에서 <스파이더맨 3>가 시장을 압도함으로써 스크린쿼터 축소의 영향력을 비로소 실감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도학 한국영상산업정책연구소 수석연구원도 “현 상황에서 스크린쿼터 73일 시대가 ‘설상가상’ 격일 수는 있어도 그게 근본적 원인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외화 블록버스터 독점 현상엔 쿼터 축소의 영향도 분명이 크다. 하지만 쿼터만 늘려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와이드 릴리즈 전략의 보편화와 한국 영화산업 침체 등이 복잡하게 물려 있다.”

한국 영화시장, 90년대 상황으로 돌아가는가?

<스파이더맨 3>

결국 한국영화의 산업 환경이 이대로 지속되는 한 <스파이더맨 3> 현상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괴물>(43.2%), <한반도>(36.7%), <타짜>(31.8%) 등 스크린 점유율 30% 이상을 차지한 7편의 영화 중 5편이 한국영화였던 지난해에 비해 눈에 띄는 한국영화 대작이 예정돼 있지 않은 올해는 상황이 더 어려울 듯하다. 게다가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슈렉3> <트랜스포머>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등 강력한 외화 카드가 줄줄이 포진해 한해 내내 이번과 비슷한 양상이 지속될 전망이다. 이는 극장쪽에서도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스파이더맨 3>의 독주 현상을 경쟁력있는 한국영화 부재로 분석하는 이상규 CGV 홍보팀장은 극장도 외화보다는 한국영화가 흥행을 주도해야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극장에서 대박을 치는 영화들은 한국영화들이다. 흥행한다 싶으면 600만, 700만이 나오고 1천만명이 가능한 것도 한국영화다. 할리우드영화는 현재 아무리 잘되도 700만명을 넘기기 힘들고 대부분 100만명 선에서 멈춘다.” 김도학 수석연구원도 “평소 꾸준한 관객점유율을 보이는 한국영화가 무너지면 극장도 곤란해진다”고 본다. 보통 할리우드 직배사는 수익배분 비율이 높기 때문에 극장으로선 한국영화층이 두텁게 받쳐줘야 할리우드 직배사에 휘둘리지 않고 수익배분 협상에 응할 수 있다는 논리도 있다. 이처럼 지난해 말부터 한국영화의 흥행 침체 및 투자 위축이 계속되자 앞으로 한국의 영화산업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특정 시즌을 장악하던 과거 시절로 되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도 팽배해가고 있다. 최근 마이너스 20% 수준으로 악화된 수익률과 한때 전체 수익의 60% 수준이었던 해외 판권시장의 붕괴 등 한국영화의 위기 상황에 특정 외화의 스크린 독점 현상은 한 가지 징후를 덧붙인 셈이다. “92, 93년보다 상황이 안 좋은 것 같다”는 심재명 MK픽처스 이사의 말도 제작자들의 과민반응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스파이더맨 3>는 변화의 총체적 징후

이 같은 위기 의식 속에 영화계는 와이드 릴리즈 제한부터 제작 환경 체질 개선에 걸친 다각도의 대안을 모색하는 중이다. 일부에선 관객에게 공정한 선택의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개봉 첫주에 한해 스크린 수를 제한하는 등의 대안을 논의하기도 한다. 배급이 흥행을 좌우하는 현재 유통구조의 특성상 첫주 스크린 수에 규제를 둠으로써 초반 와이드 릴리즈의 폐해를 단속하겠다는 것이다. 제작자들은 부가판권 시장 개척과 인터넷 등의 배급매체 개발로 극장 의존도를 낮추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그외에도 해외 TV시리즈의 선전,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영화 매체 자체의 위축과 관객 성향 변화도 주시 중이다. 일각에서는 <스파이더맨 3>의 표를 못 구한 관객이 다른 영화로 넘치는 ‘오버플로’ 현상이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엔터테인먼트가 다각화된 지금 원하던 영화 대신 다른 영화로 넘어가는 관객은 더이상 없다는 것이다. 신용카드 및 이동통신 할인이 없어지고 영화 관람 비용이 증가하면서 과거와 관람 형태가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전세계 동시개봉이 대세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움직임도 한국영화 환경에 영향을 끼칠 요주의 대상이다. <스파이더맨 3>가 스크린을 줄일 개봉 3주차에 해당하는 5월23일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가 물리고, 같은 간격으로 <슈렉3>가 들어오는 스케줄은 할리우드의 새로운 세계시장 전략인지도 모른다. <스파이더맨 3> 현상은 한국 영화계가 겪고 있는 변화의 총체적 징후이자 앞으로의 상황을 비추는 지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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