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소유욕일까? 피겨 아티스트 김형언(43)이라면 끄덕일 것이다. CF 조감독, TV 가요 순위 40위권에도 진출했던 대중가수 이력을 가진 그가 피겨 작가가 된 것은 이소룡을 향한 뜨거운 흠모의 정 때문. 이소룡이 타계한 줄도 모르고 <정무문>을 접한 초등학교 4학년부터 막무가내로 이소룡을 동경해온 그는, 이소룡 30주기인 2003년에 이르러 드디어 30cm 축소판으로 우상을 부활시키기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전공(금속공예)과 예상치 못하게 재회한 순간이기도 했다. “너무나 이소룡을 좋아하다보니 눈앞에서 입체로 보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다. 밀랍 인형을 볼 수도 있지만 집에 두기에 크고 가지고 다닐 수는 더욱 없다. 말하자면 이소룡을 만나고 싶어서 창조한 거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항상 보고 싶다는, 연인들의 상투어가 김형언 작가에게는 구태의연한 표현이 아니었던 셈이다.
4월11일부터 5월6일까지 그의 첫 번째 개인전 <김형언의 피겨 세계>가 열리는 서울 종로구 팔판동 벨벳 갤러리에 들어서면 당신은 거인이 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갤러리 1층에서는 한 솔로, 인디아나 존스, 제임스 마샬 대통령(<에어포스 원>), 존 로벨 대위(<라이언 일병 구하기>), 록키 발보아, 포레스트 검프가 회합을 갖는 중이다. 해리슨 포드의 얼굴에 조금씩 드리우는 황혼이 정겹고, 작품마다 몸집은 눈에 띄게 달라도 찌푸린 미간은 한결같은 톰 행크스가 미소를 자아낸다. 가장 오래 시선을 붙드는 작품은 여백을 살리고 채색도 단순화한, 버스 정류장의 포레스트 검프. 관절이 없어 다른 피겨들과 달리 액션을 취할 수 없지만, 조명을 받아 드리운 그림자가 완성하는 정취가 입체만이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을 입증한다. 지하로 내려가면 <용쟁호투> <맹룡과강> <정무문> <사망유희>에서 불러낸 여섯명의 작은 이소룡(추가 예정)이 기를 겨루고 있다. 열혈 숭배자가 되살린 망자의 모습은 파라오의 미라처럼 장엄하고도 쓸쓸하다. <용쟁호투>의 이소룡은 영화 속 공간인 거울 방을 재현한 디오라마(배경)를 거느리는 호사도 누리고 있다. 홍콩 엔터베이와 계약을 맺어 지난해 10월 대량 생산(3500개)된 <용쟁호투>판과 4월 말 출시될 <맹룡과강>판은, 안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김형언의 피겨는, 애정없이는 불가능한 집요한 관찰과 인물의 정기를 살린 세부묘사로 국내외 피겨 팬들을 매료시켰다. 지난해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코미콘(Comicon)과 롱비치 무술박람회에서도 환대받았다. 그가 집중하는 곳은 얼굴. 영화를 보며 여러 각도의 숏을 캡처해 안면 골격을 세운다. 장면마다 얼굴도 미세하게 달라서 평균치를 찾아내야 한다. 김형언 작가는 그의 우상이 유난히 까다로운 얼굴을 지녔다고 애정을 담아 불평한다. “독일계 혼혈이기도 하지만 파악하기 힘든 얼굴이에요. 지금껏 그를 제대로 재현한 작품이 없었던 것이 다 이유가 있어요.” 김형언 작가는 앞으로 작품의 사이즈와 채색기법을 달리 해보고 극사실주의에서 눈을 돌려 일정한 추상화도 시도해볼 작정이다. 그가 눈뜸을 들이고 있는 배우들은 <로마의 휴일>의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제니퍼 코넬리, <원더우먼>의 린다 카터, <슈퍼맨>의 크리스토퍼 리브, <미스터 빈>의 로완 앳킨슨. 하지만 주문, 청탁은 받지 않는다. “뮤지션도 의뢰받아 곡을 쓰진 않잖아요? 제게 감흥이 없는 인물을 만들 순 없어요. 열정이 동해야 만드는 거죠.” 훌륭한 음반을 한장 내겠다는 꿈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김형언 작가는, 전시회 폐막에 맞춰 자신의 밴드 ‘싱글즈’를 이끌고 갤러리에서 공연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