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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배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나카타니 미키
김도훈 2007-04-19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2004년의 늦여름이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로프트> 촬영현장을 3일간 따라다니며 나카타니 미키와도 꽤 오랜 시간을 동행하게 됐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일본의 여배우란 다가서기 힘든 인종일 것이라 지레짐작한 탓에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유들유들한 척이라도 해볼까. 고민하는 사이 나카타니가 한국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능숙하지는 않으나 정갈한 한국어였다. 자연스레 화제가 <역도산>으로 흘러가자 나카타니가 반색하며 또박또박 찬사를 내뱉었다. “설경구야말로 진짜 배우. 괴물 같은 남자.”

그로부터 1년 뒤 나카타니 미키는 <역도산>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존경하는 괴물 설경구와의 협연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는지 인터뷰마다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하지만 <역도산>은 두 나라에서 기대만큼의 성적을 내놓지 못했고, (<로프트> 취재 당시 슬쩍 들었던 이야기에 따르자면)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를 위해 열심히 물밑작업을 벌였으나 역할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닌 고유키에게 돌아간 지 오래였다. 나카타니가 외국과의 프로젝트에 그토록 힘을 쏟은 이유는 일본이 원하는 여배우상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21세기의 일본 영화계는 개성 강한 90년대 여배우들을 제치고 등장한 순결한 소녀들의 시대가 됐다. 아오이 유우와 우에노 주리가 옆집 소녀 같은 미소를 시장에 내놓으며 인기를 누리는 시절이다. 나카타니는 모두가 원하던 <전차남>의 에르메스녀 역할을 따냈으나 대중은 드라마 <전차남>의 이토 미사키를 좀더 아꼈고, 일본의 젊은이들은 심지어 나카타니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도 잠시 출연한) 시바사키 고우로 착각하기도 했다. 나카타니는 지난해에 내놓은 에세이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매달려>(ないものねだり)에서 시바사키 고우로 오해받자 모르는 척 시바사키의 사인을 해준 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어쩌랴, 세상은 그토록 빠르게 새로운 얼굴을 찾아가는 것을. 하지만 나카타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연기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으로 새로운 절정에 올라섰다. 데뷔 14년 만의 일이다.

녹차같은 여자와 악의 화신 사이

“평범한 사무직 여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던” 나카타니 미키는 지난 1993년 춤과 노래도 잘하는 참한 여배우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몇몇 드라마를 통해 전통적 미인으로 호감을 얻은 그녀의 초창기 대표작은, 어쩌면 일본의 녹차 브랜드 ‘이토엔’(伊藤園)의 광고일지도 모른다. 지난 12년간 나카타니는 이토엔의 얼굴을 독차지해왔다. 맑은 녹차가 어울리는 일본의 여인. 그것이 나카타니 미키의 대중적인 이미지다. 하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평생을 관통해도 충분히 벌어먹고 살 일본의 연예계에서 나카타니의 에고와 재능은 고인 녹차처럼 머무르지 않았다. 제대로 된 연기자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지난 1999년 방영된 <TBS> 드라마 <게이조쿠>(ケイゾク)로 마침내 자신이 사랑스러운 여인상에만 머무르지 않는 쓸모있는 배우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게이조쿠>에서 나카타니가 연기한 시바타 준은 8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일본 드라마 팬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는 기념비적 캐릭터다. 떡진 머리의 도쿄대 출신 천재 경찰 시바타 준이 “범인을 알아버렸어요”라고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순간, 일본의 대중 역시 나카타니 미키라는 새로운 얼굴에 완벽하게 홀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드라마 속에서 대중적인 캐릭터들을 연기해온 나카타니가 스크린으로만 건너가면 영락없이 공포영화 속 신경쇠약 직전의 히로인을 도맡았다는 사실이다. 날카로운 고양이상을 한 나카타니처럼 일본적인 팜므파탈에 어울리는 연기자도 드물긴 하지만, 나카타니는 자신의 얼굴을 하얀 캔버스로 이용한 뒤 형언할 수 없는 흑색의 어두움을 덧칠하는 재주를 부린다. <링>과 <링 라센> <링2>에서의 연기도 좋지만, 나카다 히데오의 <카오스>에서 나카타니 미키는 지켜보는 것이 두려울 만치 어두운 존재 그 자체다. 보통의 여배우라면 남자주인공을 의혹의 우물 속으로 집어던지는 은밀한 미녀에 그쳤을 역할이건만, 나카타니는 남자의 삶을 겹겹이 싸인 혼란 속으로 물고 들어가는 카오스를 온몸으로 연기해낸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로프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카타니는 남자의 죽음을 지켜본 뒤 알 듯 모를 듯한 냉소를 얼굴에 띠며 돌아서는데, 그것이야말로 이토엔 녹차 광고와 <게이조쿠>의 시바타 준과는 다른, 나카타니의 영화적 얼굴이다.

서른두살 거침없는 여배우의 비상

주로 공포영화를 통해 은밀히 발산되어온 나카타니의 숨겨진 에너지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통해 폭발적인 에너지로 분출해나온다. 하지만 “공포영화를 무척 싫어하지만 흥미로운 감독들과의 연기가 좋아서” 아무런 투정없이 흔쾌히 출연했던 전작들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전혀 다른 경험을 나카타니에게 안겨주었다. 첫날부터 고난은 예정됐다. 촬영장에 나가 “어떤 방향으로 연기할까요?”라고 물었더니 나카시마 데쓰야는 “영화는 전부 거짓말이다. 진짜 같은 거짓말과 가짜 같은 거짓말이 있다면, 나는 후자가 좋다”는 말을 던졌다. 사실적인 연기는 필요없다는 의미였으나 신중하게 배역을 계산하는 데 재능을 발휘해온 나카타니는 감독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데포르메(변형)해도 될까” 싶어서 두려웠다. 본격적인 촬영은 더욱 만만치가 않았다. 한신 한신을 완성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끊임없이 길어졌고, 감독은 “그 따위로 연기하다니 얼굴도 보기 싫다”는 등 “내일부터는 배우를 교체하려고 한다”는 둥 끊임없이 나카타니의 약을 올렸다. “치사했다. 전차에 타는 장면을 찍을 땐 얼굴이 연가 가수처럼 됐다고 호통을 들었는데,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상태에 부딪힌 거 같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배경에 전신주가 비쳐서 잘못된 장면을 두고 내 책임으로 돌리다니 정말 나쁜 사람이라 생각했다.” 촬영을 개시한 지 두어달이 지나자 무조건 “와카리마시다!”(잘 알겠습니다!)라고 소리칠 힘도 여유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연기가 가능한 여배우를 데려다 써보시지’라는 심정이 된 나카타니는 연기 사상 처음으로 감독에게 대들었다. 격렬하게 대들었다.

<전차남>

<역도산>

하지만 고통스러운 현장을 감내하며 마츠코를 연기하던 나카타니는 뭔가 예전과는 다른 힘을 감지했다. 밥도 꼬박꼬박 잘 먹게 됐고 생활도 괴이할 정도로 규칙적이 됐다. 전작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절규하는 장면을 연기한 뒤에는 감정을 모질게 끊어내지 못한 채 불면증에 시달렸던 그녀다. 매일매일 감독과 싸우면서도 잠은 너무나 달콤했다. 나카타니는 촬영장과 생활의 묘한 불일치가 마츠코라는 여인에게서 온 것임을 깨달았다. “마츠코는 뒤끝이 없는 캐릭터였다. 과거를 잘라버리기 전에 앞으로 먼저 나아가고, 다음의 행동으로 가기 전에도 여백이란 것이 필요치 않다. 나 역시 촬영이 하나로 끝나는 여행처럼 여겨졌다. 그건 감독의 연출법 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카타니 미키는 촬영을 마친 뒤 3개월 동안 무려 4번에 걸쳐 단독으로 인도를 여행했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촬영 중에 썼던 240페이지 분량의 일기를 정리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매달려>(나이모도 네다리)라는 제목의 에세이로 펴냈다.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폭언과 나카타니의 독기가 모조리 실려 있는 에세이는 1만부 이상이 팔려나갔고, 감독과 나란히 시사회장에 앉아 영화를 기다리던 나카타니 미키는 자신의 이름이 황금빛 타이틀에 박혀 스크린에 투영되는 순간,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자 자신의 연기를 불처럼 이끌어낸 감독의 재능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토로했다. “나의 상상력은 매우 작았다. 나의 상상력이 지구라고 한다면 감독의 것은 우주였다.” 나카타니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통해 전혀 다른 비전을 지닌 감독과의 협연이 자신을 다른 단계로 성숙시켰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녀의 도전은 계속된다

새콤한 스타덤이 지겨워졌을 지난 90년대 후반, 나카타니는 “세상의 모든 것이 듣기 싫어서 귀마개를 가방 속에 지니고 다니는 상태”에 빠져버린 경험이 있다. 그녀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음악을 갈구했고, 극적인 탈출구는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거장이었다. “그렇게 신 같은 사람을 이토록 젊은 나이에 만나버리면 남은 인생에서는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면 좋을지” 반대로 목표의 상실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녀는 사카모코 류이치와 몇장의 음반을 만들며 새로운 힘을 되찾았고, 도전적인 영화작가들과의 협연에 몸을 던지는 것도 마다지 않는 법을 배웠다. 전통적인 일본 여인과 열정적으로 새로운 모험을 찾아가는 여배우. 두개의 분절된 이미지를 타고 놀던 나카타니는 마침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통해 동세대의 일본 여배우들이 근접하지 못하거나 근접하기 꺼려하던 모호한 마력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어떤 여배우가 무시무시한 감독의 세계와 정면 대결을 불사하고 자신을 불태워 마츠코의 30년을 연기해낼 수 있을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추파춥스처럼 달콤한 소녀배우들의 시대에 던지는 서른두살 여배우의 거침없는 도전장이다. 이제는 나카타니가 3년 전 <로프트> 촬영현장에서 설경구를 향해 던졌던 찬사를 고스란히 되돌려주어도 좋을 것이다. 나카타니 미키야말로 진짜 배우. 괴물 같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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