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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함을 향한 숭고함, 김기덕 감독의 <숨>

언론과의 입씨름을 뒤로하고 김기덕은 또 초연하게 영화를 만들었고 <>을 완성했다. 당초 알려진 것처럼 외도하는 남편을 둔 여자가 사형을 앞둔 죄수를 만나면서 시작되는 영화다. 그런데 그렇게만 말하고 지나치기에는 영화가 깊다. 언뜻 보면 유치해 보일 정도로 간결하지만 깊은 사유의 폭과 힘을 지닌 영화다. 들숨과 날숨의 그 열기를 정한석 기자가 미리 전한다. 그리고 영화평론가 남다은, 문화평론가 남재일, 문학평론가 이명원, 소설가 천명관 등이 쓴 영화평을 더해 <>의 여러 측면을 조망해본다.

김기덕의 영화에 관해 아직까지 덜 말해진 것을 말하는 것으로 혹은 이미 말해진 것에 관해 다르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그의 영화에서 대사가 줄어들고 있는 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되어왔다. 그런데 그게 정작 그의 영화 구조를 이롭게 만드는 ‘어쩔 수 없는’ 최선이라는 점은 잘 거론되지 않는다. 그의 영화 속 대사는 종종 너무 직접적인 나머지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처음부터 근래까지 자주 그래왔고 전작 <시간>은 더 심했다. 단순히 생각해도 대사가 많은 김기덕의 영화보다 대사가 적은 김기덕의 영화가 훨씬 매력적이다. 유독 대사가 많았던 <시간>은 지독하게 서늘한 울증의 영화였지만 그게 김기덕 영화의 최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에서는 주인공인 여자가 사형수를 위해 반복적으로 노래하고 말하는 장면이 있으므로 이 영화 역시 대사가 적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에서 이 여자의 대사는 ‘육성’의 행위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그건 사형수와 자신을 위해 여자가 벌이는 숭고한 재현 의식(儀式)의 일환이다.

김기덕은 근본적으로 숭고에 대한 예찬자에 가깝다. 주로 인물들이 침묵할 때 숭고한 행위가 일어난다. 그들이 침묵해야 우리도 그들 행위의 숭고함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제멋대로 말하자면, 숭고란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경탄이며 바로 그 경탄을 사랑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이르는 상태이며 그 상태를 사랑하는 태도다. 김기덕의 영화를 종교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세속 안에서 숭고함을 받아들이는 태도 때문이지 말 그대로 기독교적이거나 불교적인 의미의 어느 한쪽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니다. 김기덕의 영화에는 끌어안을 수 없는 것조차 끌어안으려는 숭고함이 자주 보인다. <>도 그렇다.

한 가지를 더 덧붙일 수 있다.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배우들의 연기가 ‘어쩔 수 없이’ 어색해 보인다. 연기가 어색하다는 것은 배우 개개인의 자질이나 김기덕의 연출력 부재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김기덕의 영화가 무엇을 지향하는지와 연결되는 것이고 그의 인물들이 어떤 역할로 그 지향에 부합하고 있는지와 연관되는 문제다. 김기덕의 영화는 어떤 충만한 개념들이 가득 찬 창고와도 같다. 배우들은 인물로서 그 개념의 형상화에 복무해야만 한다.

인물 대신 개념이 숨쉬는 김기덕의 영화

김기덕은 자신의 영화가 반추상의 영화라고 꾸준히 이야기해왔지만 지금도 그 말이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은 근래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실제와 어떤 절반의 연관을 맺고 있기보다 추상의 극한까지 다가가서 아름다움을 만지고야 만다. <>과 근작들을 보면 그가 반추상에서 추상으로 더 깊숙이 진입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여전히 반추상이되 그것으로 무엇을 담았는가에서 차이가 생긴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김기덕의 영화에 쏟아지던 비판의 포화가 멈춘 것은 (물론 신뢰할 만한 평자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세상의 모순을 육화하는 자리에서 정신의 고양을 추구하는 자리로 자기의 위치를 옮기면서부터다. 그의 영화를 둘러싸고 실제를 어떻게 재현하는가의 문제 즉 육신의 관할을 두고 한때 소란이 벌어졌다는 점을 지금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김기덕은 지금 정신의 방황이나 고양을 전도하는 데 더 애쓴다. 혹은 <시간>처럼 육신의 변형이라는 문제를 다루더라도 정신의 차원으로 흡수하는 경향이 있다.

되돌아가서 말하자면, 그 안에서 배우들은 그 역을 ‘살아내기’도 곤란하고 그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무방비의 자유로움으로 방출하기도 힘들다. 메소드 연기는 불필요하고 브레송의 모델이 되거나 홍상수의 반-자연인으로 남기는 더 힘들다. 실제로 <>에 나온 장첸(사형수 장진)의 연기가 허우샤오시엔이나 왕가위 영화에 나왔을 때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하기 힘들다. 박지아(연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극중에서는 그 이름이 불리지 않는 여자)의 연기가 지난 김기덕의 영화에서보다 더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정우(여자의 남편)는 용기있는 출연 결정을 내린 것이고, 강인형(사형수 장진을 사랑하는 어린 죄수)은 앞으로 언제 또 해볼지 장담하기 힘든 가장 독특한 인물을 연기해보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김기덕의 영화에 설경구나 송강호처럼 영화 속 인물의 삶을 살아내는 데 도가 튼 배우가 출연하기 위해서는 그 배우가 자기의 기와 배우로서의 입지를 양보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아예 불가능하다.

여기에 김기덕 영화의 특징이 있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인물은 현실을 모방하며 숨쉬고 개념은 뒤로 감춰진다. 배우의 양식적 연기에 많은 것을 걸고 정서를 기대하는 영화들도 많다. 김기덕은 그런 흐름들과 명확하게 갈라선다.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인물 대신 개념이 숨을 쉰다. 배우가 거기에 양보하고 헌신하는 형태를 보인다. 역설적으로 그때 김기덕의 영화는 공고해지고 사랑스러워지고 아름다워진다. 그 극진한 반추상 혹은 반추상에서 추상으로라는 구도 안에서 곧잘 그들은 어색해 보일 수밖에 없지만 그때 영화 전체는 아름다워 보인다. <빈 집>이 그 진면목을 보였고 <> 역시 그런 영화다. 동시에 이 영화들은 보는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 변화까지 요구하고 있다. 물론 영화가 개념에 치우칠 때 어떤 난점들이 생기는지를 같이 지적해야겠지만 지금은 적어도 그걸 말할 자리가 아닌 것 같다.

전작들과의 열려있는 관계를 갖는 <>

일단 <>을 보고나서 <악어>의 용패가 떠올려지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다. 용패는 물속에 갇혀 숨이 차서 죽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는 자신이 선택한 죽음 앞에서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죽었다. <>의 사형수 장진도 유사하다. 그러고 보면 두번의 시도 끝에 그러니까 한번은 밧줄로 목을 감아 죽으려다 말고 그 다음은 다시 ‘물’에 빠져 정말 죽은 <>의 노인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처음에는 시나리오의 결말을 한기가 거울 앞에서 숨을 참아 자살하는 것으로 해놓았다”는 <나쁜 남자>에 대한 김기덕의 설명도 당연히 생각난다. 숨이 막혀 죽는다는 것은 김기덕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죽는 방법의 소망이다.

<숨> 촬영장의 김기덕 감독

또는 <>에서 사형수를 찾는 여자의 방문은 현실의 관계를 뛰어넘는 배려의 행위라는 점에서 <사마리아>를 떠올리게 한다. 혹은 무기와 악기라는 <>의 양면성과 김기덕이 <>에서 주장하는 날숨과 들숨의 작용 역시 겹친다. 그리고 <>을 말하면서, 여자의 갑작스런 방문을 말하면서, <빈 집>에서의 태석의 방문과 마지막 그들의 삼각 공존의 상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으론 면회실을 계절별 사진으로 도배하여 시간을 재현해낸다는 점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시간>의 얼굴이 <빈 집>의 집과 같고 이 영화의 감옥과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생각도 저버리기 어렵다. <>에서 소년이 갖는 목격자로서의 기능과 <시간>에서 형상을 쥐락펴락하는 의사와 <>에서 안 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재현의 집권자 보안과장(김기덕 감독이 이 역할을 직접 하고 있다)을 연관짓는 것도 우리로선 당연한 일이다.

<>은 김기덕의 많은 전작들에 관한 연상을 허락하고 있다. 김기덕 본인은 <>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2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마 <빈 집> 2편이나 <악어> 2편이라고 누군가가 말해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밖에도 떠올리자면 여러 가지가 더 있겠지만 여기서 그걸 더 나열하는 건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럼 무엇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간결한 나열구조 속의 불균형과 불일치

<>은 매우 간결한 일련의 나열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매우 복잡하고 불균질적인 연쇄가 일어난다. 외도하는 남편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여자가 어느 날 사형 집행일을 남겨두고 절망적으로 자결을 시도하는 사형수에 관한 뉴스를 본 뒤 문득 그가 있는 교도소로 찾아가 그를 위해 감옥의 면회실을 계절별로 꾸민 다음 노래를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자기의 사진을 건네주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그 사실을 눈치챈 남편이 그녀를 뒤쫓아 와 그 광경을 본다. 이렇게 이어지는 스토리를 그다지 매끄럽다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김기덕의 영화에는 언제나 심리적 공간감이 있을 뿐 지리적 공간감은 없다. 그 인물은 거기 갈 필요가 없지만 거기에 갈 수 있고 만남은 언제든지 성사 가능하다. <>에서도 여자는 거기에 갈 필요까지 없었지만 사형수 장진을 찾아간다. 그들은 만났고 그 만남이 어떻게 지속되는지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이라는 제목이 뜨기 전 첫 번째 장면에서 카메라는 감옥 벽면에 무언가를 그리는 어떤 남자의 손을 보여주고는 이어 누워 잠자는 사형수 장진의 얼굴로 옮겨간다. 그에게 안겨 있는 어린 죄수는 엄마에 대한 꿈을 꾸다 깨지만 장진은 정사의 꿈을 꾸는 게 분명하다. 그러다 장진은 깨어나서 그림 그리는 남자의 도구를 빼앗아 자기의 목을 찌르고 병원에 실려간다. 그 꿈이 한낱 이루어질 수 없는 비참한 꿈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꿈이 그를 방문한다. <>에서 여자는 장진에게 인물이 아니라 꿈이자 소망이라는 개념이다.

여자는 집에서 아이와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장진에 관한 뉴스를 본다. 얼마 뒤 남편의 외도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여자는 충동적으로 사형수 장진을 찾아간다. 그에게 여자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거 말해 봐요. 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고 싶은 거”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다음 면회부터 봄, 여름, 가을의 벽지로 면회실을 도배하고 그를 위해 계절의 노래를 불러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신의 사진을 건네준다. 처음 시나리오에는 1년간의 시간이 유예되었으면 좋겠다는 장진의 대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처음 이 여자의 행동을 보면서 그게 사형수 장진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기 쉽다. 혹은 이제부터 둘의 사랑이 시작되는 게 아니냐고 예측할 수도 있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가 않다. 여기에는 불일치가 있다. 아마도 장진은 여자의 방문을 받으며 점차 사랑을 느끼겠지만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방문은 자신을 위한 치유의 의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 면회실에는 두개의 시간대가 동시에 재현되고 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장진을 위해 펼쳐진 계절의 이미지들이다. 즉 그를 위한 시간의 연장이다. 또 하나는 여자의 과거 시간이다. 그러고 보면 여자는 장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 여자가 육성으로 노래를 할 때 그건 장진을 위한 선물이지만 말할 때를 보면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행위다. 그 행위는 유년 시절 물속에 빠져 죽을 뻔한 여자의 기억을 포괄하기 때문에 장진이 앞으로 맞을 죽음이라는 미래의 시간에 대한 여자의 앞선 경험담이기도 하다. 장진에게는 시간의 연장이고 여자로서는 기억의 복원인 이 재현 의식이 세번 반복된다. 장진이 처음에 정사 꿈을 꾸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자는 장진이 원하던 소망(혹은 환상)의 실현이지만 그 여자가 장진을 찾는 행위는 자신의 위태로운 현재를 복구하고 싶어하는 안간힘이기도 하다. 남편이 여자의 방문을 알아차리자 사태는 좀더 복잡해진다.

영화 밖과 영화 안을 조율하는 관할자로서의 김기덕

이상하게도 남편은 여자를 완벽하게 봉쇄하지 않는다. 그는 여자의 방문을 한번 막아서더니 그 다음에는 혼자 장진을 찾아가 이제 그녀는 오지 않을 거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때 남편은 여자가 장진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그녀의 나체 사진을 건네준다. 남편은 의아하게도 장진과 아내 사이에 이뤄진 이 환상의 관계를 중개한다. 실상 그 중개가 그의 역할이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 남편은 여자와 그리고 어린 딸까지 데리고 다시 가족 나들이 하듯 교도소에 또 한번 온다.

그런데 남편이 중개자로 나섰을 때부터 장진과 여자의 관계는 도리어 확실히 결렬되고 여자는 가정을 복구하기로 마음먹는다. 어쩌다 건물 밑으로 떨어진 남편의 셔츠를 쓰레기통에 그냥 버리는 초반부의 장면, 일부러 떨어뜨려본 남편의 셔츠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다시 주워오는 후반부의 장면, 이 두 장면은 대구를 이루고 있는데 여자의 심리 변화에 대한 명확한 상징이다. 급기야 겨울 편에 해당하는 여자의 마지막 면회가 성사됐을 때 그 안에서는 더이상 아무것도 재현되지 않는다. 장진으로서는 더이상 환상이 재현되지 않는 것이고 여자로서는 그 자신의 현실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다. 그때 여자는 장진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을 한다. 그의 숨을 막아 죽음을 선사하려고 한다. 장진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기를 택한다.

장진과 여자의 관계를 중개하는 또 한 사람, 보안과장(김기덕이 출연하고 있고 모니터를 통해 잠깐씩 비친다) 역시 언급해야만 한다. 여자의 출입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그걸 허락하고 보살피는 게 보안과장이다. 이 모든 상황을 주선하는 자로서 이를테면 이 재현 의식의 관할자로서 김기덕이 등장한다는 것은 사실 너무 드러난 상징이다. 그러나 김기덕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고 밝힌다.

보안과장이 언제 벨을 눌러 그들을 갈라놓는가를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한다. 왜 그가 흥미롭게 보던 모니터를 꺼버리는지 언제 꺼버리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만약 이 영화의 이야기를 죽음의 시간을 미루는 천일야화에 비유할 수 있다면 여기서 세헤라자드는 김기덕이다. 그는 영화 바깥에서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도 환상과 재현의 현장을 조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감방의 우두머리가 그림을 그리고 여자의 직업이 조각가인 듯 보이고 남편이 음악가인 듯 보이는 것은 재현의 관할자이자 영화감독이자 예술가인 김기덕 본인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다.

공존의 강화, 모두가 공평해지는 이야기

남편과 여자, 장진과 그를 사랑하는 어린 죄수가 어떤 최후을 맞는지 눈여겨봐야만 한다. 라스트신이 펼쳐질 때 우리는 많은 걸 알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두 사람이 아닌 정확히 네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불균형적인 그리고 불일치하는 영화 속 관계의 사슬이 무엇을 묻고 답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과연 모두가 공평해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런 건 없는가. 김기덕은 이 질문에 답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은 그 자문자답에 대한 개념적 구성인 것 같다. 기묘한 화해의 극이자 희망의 극인 것 같다. 실패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고 얽혀야만 풀릴 수 있는 그런 관계들. 그러므로 그 관계는 불균질하고 인간 개인으로 끌어안기에는 벅차다. 그런데도 그 양상을 끌어안으려 최선을 다하니 숭고함이 피어난다. 다시 한번 제멋대로 반복하자면 숭고란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경탄이며 바로 그 경탄을 사랑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이르는 상태이며 그 상태를 또한 사랑하는 태도다.

<>은 어두운 죽음을 통해서건 희미한 화해의 싹을 통해서건 모두가 공평해지는 이야기다. 여기에 이르렀을 때 ‘공존’이라는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공존의 의미는 점점 더 강화된다. 그건 <빈 집>과 <>에서 유독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공존이 두 가지 의미에서의 공존이란 걸 알지 못한다면 또한 오해하기 쉽다. 김기덕이 오래전에 그 공존의 의미를 말할 때는 육신을 경유하였고 종종 동반 실패로 끝맺었다. 지금은 불균형 속에서도 화합으로 맺어지는 그런 공존에 관심을 보인다. 김기덕의 공존 안에는 성공도 파멸도 있다. 두 가지 모두 있다. <>도 그렇다. 사랑도 그렇다. 김기덕의 사랑은 소유의 권리를 주장하기 힘든 사랑이다. 그건 자타의 경계가 무너지는 개념이다. 한편으로 <>은 모두가 사랑을 쟁취하는 이야기다.

모두가 공평해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모두가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불가능을 알면서도 애써 사랑하는 것이 숭고함이다. <>은 그 숭고에 대한 김기덕의 열네 번째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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