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간들의 슈퍼히어로가 당도했다. 전미 1400만명의 고정팬을 매주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당기며 신드롬을 일으킨 미국 드라마 <히어로즈>가 지난 3월19일부터 케이블 채널 캐치온을 통해 방영을 개시했다(매주 월·화 오전 10시와 오후 10시 방영). 전통적인 슈퍼히어로물의 차원을 전혀 다른 경지로 끌어올린 드라마 <히어로즈>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누구의 손에 의해 탄생했을까. 전세계를 들뜨게 만드는 브라운관 슈퍼히어로들의 면모.
“최근 겉보기로는 관련이 없는 듯한 개개인들이 ‘비범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채 출현하고 있다. 지금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들은 세계를 구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화시킬 것이다.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의 변혁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다.”
<히어로즈>의 1화 도입부에 흘러나오는 자막은 <엑스맨>의 첫편에 그대로 따붙여도 이질감이 없을 듯하다. <히어로즈>가 전통적인 슈퍼히어로물의 적자이며, 평범한 사람들이 슈퍼히어로가 되어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노라는 선언이다. 이건 한회당 30여억원의 제작비를 투여하는 값비싼 시리즈로서는 자살에 가까운 만용일 수도 있다. 미국 TV계의 오랜 속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특정한 장르에 기반한 시리즈의 인기는 특정한 장르의 팬들로만 한정된다. 하지만 <히어로즈>는 장르에 굶주린 팬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도 성공을 거두었고, 미국에서만 매회 1400만명의 고정 시청자를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캐치온을 통해 방영되기도 전에 이미 여러 경로로 소개된 <히어로즈>는 국내 미드팬들이 가장 열광하는 시리즈 중 하나였다. <히어로즈>는 가장 최근에 나타난 미드의 슈퍼히어로다.
평범한 사람들의 "지구를 지켜라!"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숨겨진 능력을 깨닫기 시작한다. 뉴욕의 화가 아이작 멘데즈는 헤로인에 중독된 상태에서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하고, 텍사스의 치어리더 클레어 베넷은 어떤 상처도 자생적으로 치유되며 심지어 죽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LA 경찰 맷 파크먼의 귀에는 타인의 생각이 환청처럼 들려오기 시작하고, 피터 페트렐리는 자신과 형 네이선 페트렐리가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인터넷에 누드 동영상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니키 샌더스는 혹시 자신에게 또 다른 파괴적인 인격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하고, 도쿄의 회사원 히로 나카무라는 갑자기 발견한 재능으로 시공간을 넘어 뉴욕으로 텔레포트해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비밀을 발견한 채로 살해당한 인도인 유전학자의 아들 모힌더 세레쉬는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아 초능력자들을 찾아나선다.
문제는 새로운 능력을 깨달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비범한 능력을 제정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사실이다. 가정이 있고 친구가 있는 사회의 윤리적 일원들에게 슈퍼파워 따위야 거추장스러운 유전자적 영광일 뿐이다. 하지만 장르에 속한 캐릭터들은 어쨌거나 뭔가를 해야만 하며 <히어로즈>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화가 아이작은 거대한 폭발로 파괴되는 뉴욕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미래로 날아간 히로는 뉴욕에 핵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지켜본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파괴적인 미래를 막을 방도를 찾아나서고, 결국 각기 다른 슈퍼파워를 간직한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의 목표? 너무나 슈퍼히어로물다운, “지구를 지켜라!”다. 여기는 망토와 타이츠가 없는 슈퍼히어로의 세계. 미국 NBC가 제작한 <히어로즈>는 <스파이더 맨>과 <엑스맨>이 이룩한 ‘슈퍼히어로의 진화상’을 브라운관 속으로 진입시키려는 과감한 시도다.
장르의 문외한이 상상해낸 아이디어
<히어로즈>는 베테랑 프로듀서 팀 크링의 손에 의해 창조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남자가 여드름쟁이 시절에도 히어로 코믹스 한권 사본 적이 없는 장르의 문외한이라는 것이다. 별다른 히트작을 내본 경험이 없는 크링은 제대로 된 연재물을 만들어보겠다는 일념하에 머리를 열심히 굴렸는데, 딱 걸려든 이야기가 히어로물이었다. 미디어와 대중은 90년대 이후 진화를 거듭해온 슈퍼히어로영화들에 새로운 열광을 보내던 중이었다. 팀 크링은 텅 빈 노트에 삐뚤삐뚤 써내렸다. “만약, 대자연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종족을 진화시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너무나도 낡은 질문이다. 브라이언 싱어와 샘 레이미의 슈퍼히어로영화들을 모두 챙겨본 팬보이라면 결코 이처럼 고답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크링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정말이지 잘 ‘팔릴 만한’ 이야기의 시작이라 확신했고, <로스트>의 창조자 중 한명인 데이먼 린덜로프에게 넌지시 의견을 물어보았다. 의외로 린덜로프는 머리가 다 아찔했노라 고백한다. “크링의 아이디어를 듣는 순간, 나는 이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썅. 내가 먼저 생각해냈더라면!” <서바이버>류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음모론적 판타지 세계로 도입한다는 꽤나 짬뽕스러운 아이디어로 <로스트>를 성공시킨 그에게 팀 크링의 아이디어는 대중적인 성공이 읽히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거친 초안을 현실화하기 위해 크링은 오랫동안 코믹스계에서 일해왔고 <스몰빌>과 <로스트>에 참여한 작가 제프 로엡을 찾아갔다. 로엡 역시 크링의 순진하고 대담한 발상에 깊이 매혹당했다. “팀은 내게 말했다. 좋아. 캐릭터 중 한명이 손짓만으로 자동차를 들어올려 길거리로 던지는 장면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이것 봐 팀. 그건 이미 <엑스맨>의 마그네토가 했다고’.” 그러나 백짓장 같은 호기심이야말로 크링의 재능이었다. 그는 완벽한 외부인의 눈으로 코믹스 장르에 접근하는 덕에 할리우드의 익숙한 히어로물을 브라운관으로 끌어오겠다는 대범한 아이디어를 탄생시킬 수 있었고, 대중의 눈을 가졌기에 장르적 잔재미에 천착하지 않고 캐릭터 자체로 승부하는 이야기의 힘에 집중했다. 이것이 매주 1400만명의 거대한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다. 역시 신드롬을 일으킨 <사이파이>의 SF시리즈 <배틀스타 갈락티카>가 평균 200만에서 300만명 사이의 시청자를 끌어모으는 것과 비교한다면 <히어로즈>의 대중적인 소구성은 놀랄 정도다.
현실적 스토리, ’장르적’ 쇼가 되지 않도록
슈퍼히어로 장르의 투철한 팬들과 심심풀이로 채널을 돌리는 일반 대중 사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은 <히어로즈>의 가장 까다로운 서커스다. <히어로즈>는 결코 10대와 20대 남성으로 구성된 장르팬들의 환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크링은 밸런스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다면 <히어로즈>가 무너져버리고 말 거란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스토리를 최대한 현실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지나치게 ‘장르적’인 쇼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제작진의 첫 번째 수칙이다. 이러니 전신 타이츠와 망토는 등장할 여지가 전혀 없다. 브라이언 싱어가 검은 가죽 커스튬을 엑스맨들에게 입히는 것으로 장르와의 원만한 합의에 도달했다면, <히어로즈>는 텔레포트 능력을 가진 히로와 친구 안도의 대사 두줄로 모든 고민을 끝내버렸다. “내가 진짜 신분을 감추어야만 할까? 아마도 커스튬?” “니가 망토나 타이츠 이야기를 꺼낸다면 나는 다 그만둬버리겠어.” <히어로즈>의 커스튬은 작업복과 치어리더복과 경찰복과 평범한 슈트다.
그러므로 모든 캐릭터들이 주어진 능력 때문에 고통받는 ‘인간’으로 묘사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를테면, 불사신 소녀 클레어 베넷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감추고 싸우는 전형적인 십대 소녀다. 할리우드 고등학교 장르영화에서 십대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은 ‘남들과 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치어리더 클레어는 자신의 능력이 남들과 다르기에 오해받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 괴물 아니면 기니피그로 취급받게 될 거야. 대부분의 경우 둘 다겠지만.” 홀로 아이를 키우는 스트리퍼 니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오는 얼터에고 제시카 때문에 몸서리치는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의 얼터에고는 어떻게든 아이를 먹여살려야 하는 백인 하층계급 여인의 본심이 과격한 방식으로 표현된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다. 타인의 생각을 읽게 된 맷 파크만은 아내의 부정을 알고난 뒤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는 소심한 남편이며, 아이작 멘데즈의 미래를 그리는 능력은 마치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마약쟁이 환쟁이의 환상처럼 보일 지경이다.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 맨>을 통해 묘사한 ‘슈퍼파워에 따르는 책임감’이라는 과제를 <히어로즈>는 좀더 현실적으로 파고드는 동시에, 수많은 캐릭터들이 저마다 지닌 무게를 한올한올 섬세하게 풀어나간다. 로버트 알트먼이 슈퍼히어로물을 만들었더라면 <히어로즈>와 똑 닮은 시리즈가 탄생했을 것이다.
“히어로 영화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오락적”
<히어로즈>는 한때 맹목적인 소수의 팬들만이 열광했던 코믹스(그리고 슈퍼히어로물) 문화가 마침내 주류의 궤도에 올랐다는 증거다. 전신 타이츠도 없는 평범한 인간들의 영웅담은 브라이언 싱어와 샘 레이미가 거대 스튜디오와 싸워서 쟁취해낸 ‘새로운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한계마저 뛰어넘어 히어로 장르의 최종 진화 단계에 도달하고 있다. TV채널 <NBC>의 대담한 장르적 실험과 대중적인 성공 앞에서 할리우드의 공룡 스튜디오들은 무엇을 더 내놓을 수 있을까. “수많은 팝콘 히어로 영화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오락적”이라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탄성에 귀기울이라. “할리우드영화로부터 받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슈퍼히어로 스토리의 진정한 본성을 훨씬 제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조차도 따르지 못할 경지”라는 <버라이어티>의 호언장담은 괜한 농짓거리가 아니다. TV와 영화의 질적인 경계를 허물고 달려가는 미드의 진화 속도 앞에서 할리우드는 탄성 대신 탄식을 내놓을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고고하게 채널을 돌리지 마라. <히어로즈>는 어쩌면 올해 당신이 볼 수 있는 최상급의 할리우드‘영화’일지도 모른다.
아주아주 미약한 앞으로의 스포일러
무시무시한 악당과 새로운 히어로들을 만나게 될 것!
아직까지 국내 방영분에서는 <히어로즈>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채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스포일러를 완전히 까발리지 않는 수준에서 슬며시 앞으로의 전개를 들추어보자면, 주요 캐릭터들은 히로의 열정적인 행동에 힘입어 서로를 만나게 될 예정이며, 불사신 치어리더 클레어의 양아버지는 능력자들을 납치해서 실험하는 어느 단체의 비밀요원이라는 것이 곧 밝혀진다. 클레어의 양아버지가 선의를 알 수 없는 악당 노릇을 훌륭히 수행한다면, 전통적이고 무시무시한 악당은 사일러라 불리는 자다. 이 음험한 전직 시계수리공은 곳곳에 있는 능력자들을 찾아낸 다음 머리 두껑을 열고 뇌를 강탈해 능력을 흡수한다. 게다가 후반부에 들어서면 “앞으로 수많은 히어로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팀 크링의 호언장담처럼 <닥터 후>의 닥터 ‘리처드 에클레스턴’이 연기하는 투명인간 캐릭터 등 새로운 히어로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다음 시즌에 대한 수많은 억측들이 가지를 치고 또 치며 음모론을 양산하고 있다. 물론이다. 국내팬들의 표현대로 <히어로즈>는 ‘낚시드라마’가 맞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낚시’는 ‘클리프행어’(Cliff Hanger)라 불리는 미국 TV시리즈의 오랜 전통 중 하나다. 각각의 캐릭터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능력과 과업을 짊어질 운명인지 약간의 증거만 흘리며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히어로즈>의 낚시는 아주 부드럽고 우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