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리를 만나러 간 오후의 LA는 완연한 여름이었다. 베벌리힐스에 자리잡은 버티고엔터테인먼트는 샌타모니카 대로에서 약간 안쪽에 자리잡은 건물이었는데, 일반 사무실과는 달리 열린 공간과 높은 천장이 인상적이었다. 로이 리의 사무실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방에 자리했는데, <디파디드> 포스터 두장이 나란히 벽에 붙어 있었다. 내부는 무척 수수했으며 그의 책상 위에는 시나리오 한부가 놓여 있었다. <장화, 홍련>의 리메이크작인 <Tales of Two Sisters>의 최종본이었다. 인터뷰 내내 해야 할 말들을 분명하게 끊어서 이야기하는 로이 리에게서 매우 침착하고, 과묵한 스타일의 천생 프로듀서라는 인상을 받았다.
-원래 동부 출신인 것으로 안다. LA는 분위기가 당신이 자라온 동부와 많이 다를 것 같은데, LA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다. 뉴욕에서 태어났고, 워싱턴 DC에서 자랐다. LA에서의 삶에 무척 만족한다. 이렇게 멋진 날씨를 가진 곳이 흔치 않으니까. 또한 내가 일하고 있는 영화산업에 있어서도 LA는 최고의 환경을 갖고 있다. 나 역시 LA로 옮긴 뒤 영화 프로듀서가 되었다.
-<디파디드> 제작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 =홍콩의 한 회사가 내게 <무간도>를 보내와 리메이크 판권에 대해 의뢰해왔다. 홍콩 개봉 뒤 2주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원작을 접하자마자 브래드 피트를 주연으로 하는 프로젝트로 워너브러더스에 제안을 했고 받아들여졌다. 진행과정에서 브래드 피트가 젊은 경찰관 역을 맡기에는 10년 정도 나이가 많다는 점이 걸림돌이 되어 결국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돌아갔다 .
-미라맥스가 버티고엔터테인먼트의 최우선협상계약(First Look Deal)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아니, 지금은 유니버셜 스튜디오다. 일단 그쪽에서 패스하고 나면, 워너브러더스, 폭스, 컬럼비아 등 어느 스튜디오든 상관없다. 좋은 영화라면 언제나 문은 열려 있다. <디파티드>를 진행할 당시에는 미라맥스가 최우선협상계약 상대이긴 했다. 물론 그쪽에서 프로젝트를 거절해서 <디파디드>가 워너브러더스에로 간 것이고 .
-<올드보이> <태풍> <괴물> 등의 한국영화가 미국 극장에서 개봉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극장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국 관객은 자막을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자막처리된 외국영화가 성공하는 경우는 전체 영화 중 1%나 될까. 그것도 <와호장룡>이나 <영웅>처럼 스펙터클한 시대극 액션영화에 한정되어 있다. 자막이 필요하다는 것은 비단 한국영화만이 아니라 일본영화, 프랑스영화에도 해당되는 걸림돌이다. 게다가 매주 수없이 많은 새로운 영화가 쏟아져나온다. 그 속에서 스크린을 확보해 관객에게 노출될 기회를 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일반 관객이 영화의 개봉조차 모르고 지나가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
-다소 예술적인 아시아영화를 할리우드 박스오피스 수위를 차지하는 영화로 탈바꿈시키는 데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비결은. =일단 스튜디오는 프로덕션에 엄청난 돈을 투입해 작품의 전체 질을 높인다. 또한 개봉시 2천만달러에서 3천만달러의 홍보 비용을 들인다. 그에 비해 미국에서 <올드보이>가 개봉되었을 때에는 100만달러에서 300만달러 사이의 홍보 비용이 소요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좋은 시나리오를 사고, 스튜디오를 통해 스타들을 캐스팅하고, 스튜디오가 프로덕션과 마케팅에 상당한 자본을 투입해서 좋은 결과물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번에 <괴물> 리메이크 판권을 산 것으로 안다. 문화적 정서와 코드에 미묘한 차이가 있을 텐데, 미국 관객에게 어떤 식으로 접근할 것인가. =글쎄, 그건 작가나 감독의 영역이다. 리메이크의 관건은 어떻게 하면 원작을 최대한 그대로 가져오면서 이쪽 시장에 맞도록 잘 각색하느냐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추는 데 있다.
-아시아영화의 리메이크 분야에서 확실한 자리를 굳히고 있는데, 어떻게 이 시장에 뛰어들게 되었나.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 좋은 이야기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데 더 주력하기도 했고. 사실 리메이크영화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지금 제작되고 있는 상당수의 영화가 원작이 책이거나, 게임, TV드라마 등 다른 일차 소스에서 가져온다. 좋은 이야기를 찾아내려는 과정에서 아시아영화 리메이크라는 분야에 눈뜨게 되었고, 이에 포커스를 맞추었다는 점이 전략적으로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결국 남는 것은 좋은 이야기이다. 어디에서 가져왔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한국어나 일본어 혹은 중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전혀 하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좋은 리메이크 건을 찾아내는가? =내게 영화가 올 때에는 자막이 이미 붙어 있다. 요즘은 매일 하루에 한편씩 본다. 예전에는 훨씬 많이 봤지만, 현재 진행하는 프로젝트만 해도 올해 스케줄이 꽉 차서 예전만큼 보기 힘들다. 대신 회사의 스탭들은 여전히 매일 많은 영화들을 보고, 그들이 골라낸 작품을 내가 보는 식이다.
-좋아하는 장르가 있는가. 호러 장르인가? =호러. 좋아한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라면 가리지 않는다.
-어떤 것이 좋은 이야기인가? =흥미로운 이야기이지 않을까. 어떤 것이 좋은 책인가와 같은 질문이다. 감정을 건드리는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것. 영화를 보다보면 확실히 개인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있다. 다만 나는 늘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생각한다. 이 이야기가 이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지,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킬지를 늘 염두에 두면서 본다.
-SF는 어떤가? =좋아하지만 때때로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SF를 볼 때면 마치 비디오 게임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야기가 가깝게 다가오지 않을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아, 저런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겠군 하는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닿는 것 같다. SF라고 해도 <블레이드 러너>나 <에이리언>같이 훌륭한 작품들도 있으니까.
-한국 프로덕션에서 이제 할리우드쪽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시도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어떤 것을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은가? =좋은 시나리오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야기의 기본은 시나리오이다. 만약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배급하기를 원한다면 이미 좋은 출발점에 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이전에 어떤 성공사례를 가지고 있느냐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처음 발을 딛는 것이 무척 어려울 수 있다. 나 역시 처음 시작할 때 힘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가 연이어 성공하면서부터는 스튜디오가 좀더 진지하게 고려해주고 제작비 면에서도 훨씬 더 지원을 해주게 되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 힘들었다고 잠시 언급했는데, 어떻게 첫 성공 사례를 만들었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누가 이 프로젝트를 진짜로 도와줄 수 있는가,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스튜디오의 의사 결정권자이다. <링> 리메이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친구이기도 했던 드림웍스의 부사장에게 그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내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그 집에 영화를 들고 갔다. 그냥 DVD를 건네준다면 절대 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가서 옆에 앉아 영화를 끝까지 같이 봤다. 직접 긴장감을 느끼며 영화를 본 그는 곧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관심을 얻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끈질기게 달라붙어야 한다. 스튜디오에는 하루에도 수십건씩 수많은 프로듀서들이 와서 프로젝트를 프레젠테이션한다. 경쟁이 극심한 세계이다.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때로는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공격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좋은 시나리오여야 하고 스스로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프로젝트에는 데뷔 감독들이 많다. 이런 뉴페이스를 어떻게 발굴하는가? =영화를 많이 본다. 특히 외국의 젊은 감독들을 기용하는 이유는 그들이 오리지널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독특한 스타일을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지의 가능성에 대해 늘 고민하고, 새로운 재능들을 늘 찾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디파티드>의 마틴 스코시즈 같이 노련한 감독들과의 작업도 늘 열려 있다.
-당신이 진행해온 프로젝트들을 보면 외국 감독들이 눈에 자주 띈다. 한국 감독들과의 작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 감독들에게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들의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이를테면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김지운 감독에게 프로젝트 제안을 했지만, 내년 여름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기에 진행이 안 될 뿐이지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2년에 ‘버티고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으니 이제 5년이 된 셈인데,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5년 뒤에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 것 같은가? =지금과 같이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 나는 정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니까. 가능하다면, 영화제작 외에 TV시리즈 제작으로도 넓혀가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좀더 많은 해외 제작을 하는 것도 희망사항이다. 이를테면 <그루지>는 일본 도쿄에서 촬영했다. 한국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어떨까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은 쌓여 있는 프로젝트 때문에 잘 모르겠다. 근래 들어 스튜디오가 해외 로케이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합작(co-production)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볼 수 있는가? =흠, 합작은 좀 복잡한 문제이다. 스튜디오는 영화의 모든 판권을 다 소유하고 싶어한다. 특히 해외시장이 커지면서 해외 개봉 수익이 미국 내 개봉 수익을 앞지르게 되었다. 합작을 한다면 판권을 나눈다는 소리인데 스튜디오가 그 수익을 나누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그래서 시나리오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CJ엔터테인먼트의 접근 방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진행하고 있는 영화, 타이틀이 기억나지는 않는데…(<West 32nd Street> 라고 말해주자) 그렇다, 그 영화의 경우 CJ가 직접 모든 것을 프로듀싱하지 않는가. 그것도 하나의 좋은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젝트의 자세한 사항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 스스로가 모든 것에 권한을 가지고 진행한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현재 버티고엔터테인먼트에서 진행 중인 새로운 리메이크 프로젝트는 어떤 것이 있나. =<The Eyes>가 2주 전에 프로덕션에 들어갔고,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장화, 홍련>의 리메이크작 <Tales of Two Sisters>의 시나리오를 보여주며) 방금 <Tales of Two Sisters>의 제작비 승인을 받았다. 4개월 뒤에 프로덕션에 들어갈 것이다. 이제 인터뷰 끝나면 이 최종 시나리오를 곧바로 읽을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