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에도 조선 국적을 버리지 않은 재일조선인들의 학교(학생들 중에는 한국 국적, 일본 국적을 가진 이들도 있다)는 오랜 시간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 북한이 현실적으로 무국적자나 다름없는 이들에게 교육 원조비를 지원해왔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정부는 이들을 방치하고 외면해왔다. 김명준 감독이 내레이션을 통해 밝히듯, 일본의 재일조선인들은 “사라진 조선, 혹은 기호로서의 조선의 국민”에 불과하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자들의 서글픈 운명과 역사. 그러나 그들은 끈질기게 학교를 세우고 지켜왔고 그 안에서 조선말을 배우며 자신들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애를 쓴다. 홋카이도 ‘우리학교’의 아이들은 그걸 보여준다. 일본말을 쓰지 않으려고 일주일간 침묵을 지키기도 하고, 추위를 무릅쓰고 치마저고리를 입으며 자신들만의 규칙과 의식을 만들어간다. 이들의 관계는 오랜 시간 눈물과 포옹을 나누며 어린아이들처럼 육체적으로 긴밀해지는 반면, 이들이 터득한 민족의식은 놀라울 만큼 논리적이고 관념적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것은 그 간극이다. 물론 한 학생이 일본과 ‘남조선’에서 민족성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일본 운동선수들과 자신들의 사명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스스로 답할 때, 그 강한 논지에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않기란 어렵다. 그러한 논지는 단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습득된 의식이 아니라 이 아이들의 오랜 상처와 슬픔이 마침내 발화된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행여 ‘조선인은 반드시 조선말을 쓰고 조선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들에게 남겨진 거의 유일한, 사투와 다름없는 선택을 두고 민족과 국가란 허상에 불과하다고 떠벌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비판하기는 쉽지만, 이들이 서 있는 역사적 맥락이란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학교>의 아이들이 ‘가져본 적 없는’ 고향을 꿈꾸며 북한에서 유토피아를 보듯, 카메라 혹은 우리의 시선 역시 이들을 순수함 속에만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에는 분명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 연민과 감동이 지금 여기의 우리가 잃어버린, 더이상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실체없는 향수에 불과하다면? ‘우리학교’, 그건 그저 학교가 아니라 학교 밖의 현실을 반대로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학교’가 애틋한 이유는 그것이 가족적 연대감으로 이어진 공동체여서가 아니라, 학교 밖의 현실과 대비되며 그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일본사회로부터 울타리를 치고 있지만(아니, 울타리를 치도록 강요당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중요한 것은 울타리 안이 아니라 울타리라는 경계의 역사와 정치다. 그래서 영화의 후반부, 학교를 떠나는 졸업생들이 고별식을 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때, 보는 이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학교를 졸업한 이 아이들은 울타리를 떠나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김명준 감독이 말하듯, 북한과 일본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우리학교’의 울타리 내부도 더이상 평화롭지만은 않다.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아이들이 돌아오던 날, 우익 시위대가 항구에 모여 아이들을 위협하는 장면은 고통스럽다. 우익단체들의 무시무시한 외침보다도 끔찍한 것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들의 텅 빈 표정이다. 그러니 아이들의 순수함보다도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일본 내 재일조선인의 삶과 그걸 그저 보고만 있는 우리의 무기력한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