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시사회장에서 배창호는 자신도 영화를 몇년 만에 본다고 했다. <정> 때와 달리 그는 사뭇 들뜬 모습이었다. 배창호가 시스템 밖에서 고독한 작업을 펼친 지 이제 10년이다. 과거 화려한 시절을 누린 그가 자칫 옹색한 처지를 곰삭힌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길>은 참으로 고요하고 속되지 않은 작품이었으며, 사랑에는 비겁했으나 삶에는 성실했던 장돌뱅이의 길을 따라간 영화는 개인의 소박한 역사와 진중한 로드무비를 고집스럽게 완성해놓았다. 영화는 결국 감독을 닮는다. <길>은 남자가 마을 어귀로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가 길 밖으로 사라지면서 끝나는데, 한국적 미장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기 위해 그 두 장면만으로도 족하다(필자의 일천한 경험으로선, 이만희와 임권택 이후 그 같은 장면을 보지 못했다). <길>은 이 시대의 영화들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지만, 작금의 영화가 정작 필요로 하는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 존재 가치를 잃은 영화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길>은 감독의 진정성이 숨쉬는 희귀한 작품이며, 한국 현대사의 과정에서 잃어버린 가치들을 회복하는 데 영화가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 예다. <길>은 과거에 얽매인 자의 빛바랜 향수가 아니라 영화라는 작업으로 스스로의 삶을 구원하고 있는 한 고집스런 감독의 목소리다. 비아나모픽(그나마 화면비율도 맞지 않는)이라는 절망적인 형태로 제작된 DVD는 부록도 음성해설과 예고편 외엔 별다른 게 없다. 길 위를 걷는 여행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감독이 시대와 주제 그리고 제작과정에 대해 자상하게 말하는 걸 듣던 중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배창호가 <정> DVD에서 한국 최초로 음성해설을 진행했던 게 2001년이었으니, 그가 다시 음성해설은 하는 데 6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셈이다. 그의 다음 음성해설을 듣기 위해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까. 그 답은 물론 한국영화의 미래상황 위에서 구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