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영화사에서 1950년대는 중요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프랑코 정권의 통제와 검열로 국가 선전용 혹은 종교적인 영화 일색이던 영화산업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던 때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문화적 탄압이 거센 가운데,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 영향을 받은 당대의 감독들이 스페인의 사회적 문제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민은 1955년 살라망카에서 열린 영화인들의 학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반미국적인 풍자극 <환영합니다, 마샬씨>(1952)의 각본가이기도 한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은 이 자리에서 스페인영화가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사회적으로 그릇되며 지성적으로 무가치하고 미학적으로 부재하며 산업적으로 무능력하다”고 선언한다. 당대 스페인영화와 프랑코 정권에 대한 그의 저항은 카를로스 사우라 등과 함께 창립한 제작사 ‘UNINCI’를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환영합니다, 마샬씨>를 제작한 이 회사는 오랜 시간 스페인을 떠나 있던 루이스 브뉘엘을 고국으로 불러들여 <비리디아나>(1961)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반정부적인 성격 때문에 그는 1956년 <러브 메이커>(Calle Mayor)를 만드는 도중 체포되고 국제적인 비난이 있은 뒤에야 풀려나게 된다. 이번 ‘스페인영화제’(서울아트시네마, 3월8∼11일)에서는 바르뎀의 <러브 메이커>를 포함해 스페인을 대표하는 감독들의 작품 다섯편이 선보인다. 스페인의 역사적 비극에 맞선 감독들의 창작 의지와 사유의 궤적을 찾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러브 메이커>는 작은 마을, ‘사랑의 거리’에서 펼쳐지는 거짓된 감정과 그로 인한 죄의식, 진실로부터의 도피를 다룬 이야기로 현실과 괴리된 채 유희에만 몰두하는 무력한 남성성이 전시된다. 네오리얼리즘과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혼합 혹은 ‘가짜 멜로에 대한 멜로’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듯하다.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이 참여했으며 이들 중에서도 사랑을 갈망하는 여주인공을 연기한 미국의 여배우 벳시 블레어를 주목할 만하다. 한편 <절멸의 천사>(루이스 브뉘엘, 1962)는 브뉘엘이 스페인을 떠나 제2의 고향인 멕시코에서 만든 작품으로 한 공간에 갇힌 멕시코 부르주아들의 계급적 악취가 초현실적으로 형상화된다. 이 영화는 브뉘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 비견되곤 하지만, 사실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버려진 아이들>(루이스 브뉘엘, 1950)을 연상시킨다. 마약, 배설물, 탐욕으로 악취가 풍기는 귀족들의 무질서한 대저택은 <버려진 아이들>의 빈민가와 다를 바 없고, 품위를 상실한 귀족들의 본질은 저열하기 짝이 없다. 영화학자 로버트 스탬은 <절멸의 천사>를 “광대극과 아방가르드 연극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세상’이라는 카니발적 주제와 연결”시킨 작품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빅토르 에리세의 <남쪽>(1983)은 <벌집의 정령>(1972)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상흔을 내재한 소녀의 성장기다. 이 두 영화만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에리세는 스페인 사회의 모순과 비극을 아이의 시선을 통과하여 슬픈 환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남쪽>에서는 스페인 내전을 겪은 아버지의 암울한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소녀의 천진난만한 호기심이 빛과 어둠의 이미지들로 채워진다. 마샤 킨더는,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프랑코의 아이들”은 역사적 상처로 인해 조숙한 동시에 감정적으로 발육을 멈춘 형상이라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보르도의 고야>(1999), <일곱 번째 날>(2004)은 <사냥> <사촌 안젤리카> <까마귀 기르기> 등으로 유명한 카를로스 사우라의 근작이다. 1960년대 스페인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던 그는 종종 브뉘엘이 자신의 모델이라고 밝힌 만큼, 주로 프랑코 정권의 폭압과 성적 억압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프랑코 사후에는 <플라멩코>(1995), <탱고>(1998)와 같이 스페인 예술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스페인 고야영화제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한 <보르도의 고야> 역시 그러한 맥락에 있다. 이 작품은 예술가로서의 고야의 생애와 고야의 작품세계, 그리고 역사적 비극의 경계를 오간다. 사우라에 의해(혹은 고야에 의해) 나폴레옹군의 스페인 양민 학살을 다룬 그림들은 화폭 밖으로 나와 피를 뚝뚝 흘린다. 이 영화에서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의 교차는 고야의 작품으로 귀환하는 역사적 유령에 대한 무시무시한 형상화다. 천재 화가의 개인적 비극이나 회화적 미장센에 천착하는 영화들과 달리 <보르도의 고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사의 광기와 그 고통의 생생함이다. 한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일곱 번째 날>은 스페인의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두 집안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피의 비극을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