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를 앉고 살아가는 사람들
‘에고이얀 호텔’의 투숙객들은 마음속에 무언가 커다란 공동(空洞)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개가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스피킹 파츠>의 시나리오 작가 클라라의 마음속 공동은 자기에게 장기를 이식하려다 죽은 남동생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고 <엑조티카>의 중년 남자 프란시스는 죽은 딸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살고 있으며 <달콤한 내세>에서는 눈 덮인 마을의 공동체 전체가 얼마 전 열네명의 어린이의 목숨을 앗아간 스쿨버스 사고로 인한 상실감에 젖어있는 듯하다. 에고이얀의 많은 영화들은 바로 이 사람들, 누군가의 부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정서적으로 죽은 것과 거의 다름없는 사람들의 심리적 ‘치료’(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일종의 반복적 패턴을 가진 행위들, 즉 ‘의식’(ritual)이라고 부를 만한 행위들에 집착한다. 예컨대 <스피킹 파츠>에서 클라라가 사방이 흰 방에서 죽은 남동생의 이미지가 담긴 비디오 화면을 수시로 보는 것도, <엑조티카>에서 프란시스가 교복을 입은 스트립댄서의 춤을 지켜보며 죽은 딸과의 관계를 상기하는 것도, 모두 일종의 의식을 집전하는 것이다. ‘재현’의 방식들을 통해 상실감을 끊임없이 환기하면서 역설적으로 그 심적 고통을 세련되고 승화된 어떤 것으로 만드는 그런 의식 말이다.
또 하나, ‘에고이얀 호텔’을 가득 채우는 중요한 요소로 이미지를 기록·전달하는 매체들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에고이얀은 프랜시스 코폴라가 만든 미국식 아트 필름인 <도청>(The Conversation, 1974)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실토한다. 어떤 이가 무언가 기록을 하고(recording) 또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조사한다는 그 영화의 모티브가 맘에 들었다면서 그것을 자기 영화들에서 마구 써먹는다. 실제로 에고이얀 영화에는 비디오 이미지들과 비디오 테크놀로지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을 몇편 본 사람이라면 <달콤한 내세>에서 변호사가 마을사람들을 설득하며 다닐 때 ‘이제 저자가 비디오 카메라를 꺼낼 때가 되었는데…’라고 지레짐작하는 것도 절대 무리가 아니다. 에고이얀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어떤 식으로든 비주얼 이미지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 가운데 이미지가 일종의 포화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대표작을 꼽으라면 단연 <스피킹 파츠>일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계에 미만한 이미지가 인간에게 과연 어떤 역할들을 수행하는가를 죽 훑어볼 수 있다. 죽은 이를 포박하고 있는 이미지와 사랑하는 이를 포착하고 있는 이미지는 각각 그를 그리워하는 이와 짝사랑하는 이를 위한 상실감의 대체재로 기능한다. 그뿐이 아니다. 권력으로 이용되는 비디오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섹스의 도구로 혹은 뜻하지 않은 위협적인 무기로 이용되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미디어 속의 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벽이 무너지면서 아주 초현실주의적이게도 커뮤니케이션의 벽이 허물어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스피킹 파츠>는 <비디오드롬>(크로넨버그, 1982)의 에고이얀 버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에고이얀은 크로넨버그와 달리 비디오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상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은 듯 보인다. 아마도 그는 아직은 이렇게 말하는 데서 그치는 것 같다. 점증하는 비디오 테크놀로지가 어쨌든 ‘인간의 확장’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고.
지금까지 살펴본 에고이얀의 세계를 이제 통사적인 면으로 좌표를 옮겨서 한번 주시해보도록 하자. 그러면 15년을 좀 넘긴 그의 영화세계는 지금까지 대략 두번 정도의 전기(轉機)를 거치면서 그 궤적을 그려온 것으로 보인다.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 에고이얀의 93년작인 <캘린더>이다. 이 영화가 우선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에고이얀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는 점일 것이다. 에고이얀의 몸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르메니아의 피이다. 부모가 아르메니아인으로 에고이얀이 세살 무렵에 캐나다로 이주해왔는데, 가족 내의 분위기와 주위 환경의 그것이 달라 애를 먹었던 어린 그는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거부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자신의 주변인적인 정체성에 대한 사고를 영화에 적극 투영해서 만든 작품이 <캘린더>이다.
에고이얀과 그의 실제 부인인 아르시네 카니안(언뜻 이사벨라 로셀리니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를 가진 그녀는 에고이얀의 모든 영화에 출연한 배우이다)이 직접 연기하는 사진가 부부가 달력에 실릴 교회 사진을 찍기 위해 자신들의 고향인 아르메니아로 떠난다. 그곳에서 아르메니아 말을 할 줄 아는 부인은 가이드와 대화를 나누지만 그렇지 못한 사진가는 부인의 통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 사진가와 부인 사이에는 심리적 장벽이 생기고 결국 부인은 남편과 함께 떠나는 대신 아르메니아에 남게 된다. 에고이얀은 이 영화에서 아르메니아인이 속할 수 있는 세 가지 층위의 의식상태를 다룰 만한 그런 스토리를 찾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세 의식상태란 민족주의적 의식, 디아스포라적인 의식, 동화주의적인(Assimilationist) 의식을 말하는데 그 각각은 여행 가이드, 부인, 사진가와 조응관계를 이룬다. 그렇게 본다면 <캘린더>는 그들 사이의 친소(親疎)관계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들 사이의 흐름과 연쇄를 보여주는 알레고리가 된다.
조너선 로젠봄이 “종족중심주의(tribalism)와 그 위험에 대한 최고의 영화들 가운데 하나”라고 비평한 <캘린더>는 다른 한편으로는 그 독특한 형식에 대해서도 꼭 언급해야 할 만한 영화다. 에고이얀이 처음으로 대본없이 자발성을 살려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달력 사진들에 따라 총열두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각각의 챕터는 모두가 동일한 패턴을 ‘반복’한다. 달력 사진과 함께 아르메니아에서 그 사진을 찍던 과거 시간대가 보이고 부인이 없는 상태에서 사진가가 콜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현재가 이어진다. 콜걸은 전화를 쓰는데 꼭 영어가 아닌 다른 말로 통화를 하고 그동안 사진가는 부인에 대한 기억들을 메모지에 끼적인다. 대충 이런 식의 패턴을 되풀이하고 그 사이에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요소들을 병치함으로써 영화는 끝나지 않고 또 다층화되어 있는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효과적이면서도 흥미롭게 형식에까지 덧붙여낸다.
<캘린더> 이후 <엑조티카>로 예전 영화들과 유사한 지점에 속하는 세계로 다시 돌아간 듯 보였던 에고이얀은 <달콤한 내세>를 가지고 또다시 새롭게 출발할 태세를 보여주고 있다. 러셀 뱅크스(폴 슈레이더가 최근에 선보였던 싸늘한 걸작 <어플릭션>의 원작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에고이얀이 처음으로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만든 영화다. 중요한 것은 그가 각색 작업을 했다 안 했다가 아니라 각색 작업을 함으로써 영화의 빛깔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에고이얀은 자신은 인물의 삶에 대한 디테일을 포착하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하다며 그래서 작가(writer)로서는 한계를 느꼈기에 각색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에고이얀은 영화 속 인물들을 동일화할 수 있는 인물, 또는 충분히 동정할 수 있는 인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정말이지 심각한 외상(trauma)을 당하기 전과 그뒤를 모두 감상주의를 배제하고 꼼꼼하고 원숙한 터치로 담아낸 <달콤한 내세>는 인물들의 심정을 현미경으로 차근차근 들여다보듯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이건 에고이얀의 이전 영화들은 여간해선 제대로 다다르지 못했던 지점이었다.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그 원인을 세심하게 그려내지 못했기에, 게다가 한동안 에고이얀은 브레송의 ‘모델’ 개념을 신봉하는 연출자였기에, 이전 영화들 속의 인물들은 종종 무뚝뚝한 부조리극 속의 인물들처럼 보이곤 했다. 그렇다고 이런 미묘한 변화가 원작이 존재하기 때문만은 분명히 아닌 듯싶다. 러셀 뱅크스의 원작은 네 인물의 1인칭 내레이션으로 구축되어 있는데 이런 문학적 장치를 영화적으로 훌륭히 ‘번역’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아톰 에고이얀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사람들을 놀라게 해줄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만약 그의 영화사 이름에서처럼(‘에고 필름 아츠 Ego Film Arts’) 그가 자신의 ‘에고’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그의 탄탄한 활동 경력을 봤을 때 그는 여전히 우리를 놀라게 해줄 만한 영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아톰 에고이얀 필모그래피
1984년 <근친>(Next of Kin)
1987년 <패밀리 뷰잉>(Family Viewing)
1989년 <스피킹 파츠>(Speaking Parts)
1991년 <어져스터>(The Adjuster)
1993년 <캘린더>(Calendar)
1994년 <엑조티카>(Exotica)
1997년 <달콤한 내세>(The Sweet Hereafter)
1999년 <펠리시아의 여행>(Felicia’s Jour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