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에게 특권이 있다면 누구보다 빨리 해당 잡지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인쇄된 책을 먼저 보는 건 제작담당자의 몫이지만 인쇄 직전 단계의 기사나 사진은 편집장의 검열을 거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자면 편집장은 잡지의 첫 번째 독자로 비평적 코멘트를 하는 사람이다. 편집장에게 보람이 있다면 그렇게 가장 먼저 읽은 잡지가 무지 재미있다고 느낄 때다. 본분을 잊고 글 읽는 재미, 사진 보는 재미, 디자인 보는 재미에 빠져들 때마다 얼른 이 잡지를 세상에 선보이고 싶어진다. 물론 자뻑 분위기는 경계해야겠지만 어느 정도 자뻑하지 않고 잡지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할 게다. 충분치 못하다는 자책과 뭔가 빠진 것 같다는 불안과 함께 피그말리온 이야기처럼 스스로 만든 대상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한주 한주 자책과 불안과 사랑의 비중이 조금씩 달라질 뿐이다.
12년간 매주 만드는 잡지도 그러한데 창간하는 잡지라면 오죽하랴. 자책과 불안과 사랑의 파장이 하루에도 수십번 극에서 극으로 요동치는 일일 것이다. 외부자의 눈에 포착되진 않았지만 최근 몇달간 <씨네21> 사무실에도 이 같은 파장이 격렬했다. 새로운 만화잡지 <팝툰> 창간 때문이다. 격주간 올컬러로 발행될 <팝툰>은 다음주 <씨네21>과 나란히 가판대와 서점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팝툰>의 전재상 편집장은 “‘즐거운 만화잡지 만들기’가 되길 바라고, ‘즐거운 만화잡지 보기’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는데 옆에서 지켜본 바로 우선 즐거운 만화잡지 만들기에 확실히 성공했다. 격무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팝툰> 제작진의 모습은 얼마간 느슨했던 <씨네21>에도 짜릿한 자극이 됐다. 만화라는 장르의 성격이 그래선지 몰라도 <팝툰> 제작진의 유쾌한 분위기에 전염되는 느낌이었고 ‘그렇지, 잡지 만드는 일은 저렇게 신나는 일이었지’ 상기하게 만들었다. 대상이 영화든, 만화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웃음을 잃지 않는 법이다.
옆에서 일하는 덕에 <팝툰> 창간호에 실릴 만화를 미리 볼 수 있었다. 편집장도 아니면서 남보다 먼저 보는 특권을 누린 셈인데 솔직히 재미있는 한국 만화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평소 만화대여점에 가면 일본 만화들만 열심히 뒤적이던 내가 부끄러웠다. 머지않아 <팝툰>이 한국 만화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 잡지로 자리잡을 거라 기대해도 좋다. 혹시 <씨네21>이 갑자기 만화잡지를 내는 것에 대해 의아하실 분도 있으리라. 하지만 따지고보면 <씨네21>은 창간 이후 지금껏 만화에 대한 관심을 거둔 적이 없다. 이현세의 <남벌>이나 김수정 작가를 표지모델로 쓴 적도 있고 선정성이나 폭력성 문제로 만화가 공격받을 때마다 창작자의 편에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만화는 저급하거나 어린이용이라는 인식을 깨트리고 예술성에 주목하도록 한 것도 <씨네21>이 기여한 긍정적 대목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씨네21> 창간 당시 한국영화가 처한 상황이나 <팝툰> 창간을 앞둔 지금 한국 만화가 처한 상황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쥬라기 공원>의 수익과 자동차 수출액을 비교하던 10년 전처럼 만화가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풍문은 떠돌지만 예전의 영화 창작자들이나 지금의 만화가들 모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팝툰>이 <씨네21>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 만화의 르네상스를 여는 이정표가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만화잡지를 내놓게 됐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