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난다. 그것이 욕망이다.” ‘반골과 외골수의 작가’ 김기영 감독의 회고전이 열린다. 그의 영화에는 거의 예외없이 왜곡된 성적 충동, 소유욕, 질투, 동반자살, 살인, 사도마조히즘 따위가 등장한다. 김기영은 이러한 모티브를 통해 인간의 본능을 해부했고, 동시에 중산층적 배경을 끌어들임으로써 그러한 비정상의 심리를 부르주아적 욕망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요컨대 그는 인간의 본성과 시대상황이라는 상이한 두 층위를 동시에 포착하려고 했다.
김기영의 영화에는 삼각관계에 놓인 세 남녀가 질투와 욕정으로 미쳐 날뛰다가 끝내는 그들 중 누군가가 살해되거나 자살로 인해 죽음에 이른다는 설정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김기영은 이 통속적인 삼각관계 안에 섹슈얼리티, 계급성, 근대성 등의 문제를 던져놓는다. 이러한 욕망의 삼각형은 두 번째 영화 <양산도>(1955)에서 이미 나타난다. <양산도>는 한양에서 돌아온 양반의 아들이 평민의 약혼녀를 욕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탐욕과 집착, 질투로 인한 세 남녀의 갈등은 결국 잇단 살인과 자살을 불러온다. <양산도>가 당시 유행하던 사극영화의 외형을 빌려 죽음으로 치달은 인간의 욕정을 그린 영화라면, 또 한편의 사극 <고려장>(1963)은 전통적 풍습을 소재 삼아 무속과 본능이 지배하는 기이한 시공간을 펼쳐 보인다.
한편, 삼각관계는 그의 작품세계가 가장 잘 응축된 <하녀>(1960)에서 다시 반복된다. 집주인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를 유혹하는 하녀, 이들이 벌이는 치정극 속에 김기영은 중산층의 위선과 속물성, 계급성과 섹슈얼리티, 여성성과 근대화 등의 문제를 제기한다. 시골 출신의 하녀가 집주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안주인의 자리를 탐하면서 안온한 중산층 가정은 전율스러운 파멸을 맞이한다. <화녀 82>(1982)는 <하녀>의 두 번째 리메이크작. 전작들과 달리 주인집 여자와 하녀의 관계가 강조된다. 하녀가 주인집 여자를 모방하고 욕망하는 것은 <하녀>의 반복이지만, <화녀 82>에서는 주인집 여자 역시 하녀를 모방한다. 계급적 차이는 있지만 그들은 똑같이 중산층적 욕망에 사로잡혀서 서로를 모방하는 것이다. 욕망 추구에 적극적인 여성들과 달리 김기영의 남성들은 대체로 무능하다. 그들은 여성들의 부르주아적 욕망 실현의 매개물,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될 뿐 문제해결을 위해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한다. 그러한 남성성의 문제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영화가 <육식동물>(1984)이다. 부동산 투기로 큰돈을 번 사업가를 아내로 둔 중년 남성의 무능은, 그가 기저귀를 차고 젖병을 빠는 괴이한 이미지를 통해 간명하게 드러난다. <육식동물>은 <충녀>(1972)의 리메이크작. 당대의 섹스 심벌 안소영을 주인공으로 한 <자유처녀>(1982) 역시 강한 아내, 젊은 여성, 그리고 무기력한 남성이라는 인물구도를 반복하면서 젊은 여성을 프리섹스주의자로 설정해 에로티시즘에 초점을 맞춘다.
김기영 감독은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자기 식으로 변주해냈다. 이러한 작가적 기질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잘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이만희의 <만추>를 리메이크한 <육체의 약속>(1975). 김기영은 원작의 대략의 골격만을 유지한 채 육욕과 관능의 문제에 무게중심을 옮겨놓았다. <이어도>(1977) 또한 이청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면서도, 원작과 거의 아무 상관없는 영화. 미스터리 구조를 띤 <이어도>는 주술과 과학, 원시적 생명력과 근대적 규율이 동시에 작동하는 기이한 공간 파랑도를 배경으로 인간의 ‘마성’을 펼쳐 보인다. 이화시, 박정자의 광기어린 연기가 강렬한 인상을 주는 영화다. <파계>(1974) 역시 외형은 종교영화, 구도영화를 띠고 있지만, 욕망과 집착, 질투와 광기와 같은 김기영식 심리 해부가 핵심을 차지하는 영화다. 한편, 이번 회고전에서는 김홍준 감독이 만든 김기영 다큐멘터리 <감독들, 김기영을 말하다>도 상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