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자유롭게, 새털처럼 가볍게. <바람피기 좋은 날> 속 ‘이슬’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그 배역을 연기하는 김혜수의 지금 모습과도 비슷해 보인다. 불륜 현장을 남편에게 ‘급습’당했으면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이힐 차림으로 야산을 타 넘는 이슬처럼 김혜수는 연기 세계의 새로운 굽이를 또각또각 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혜수에게서 바람과 새털의 느낌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아마 <타짜>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김혜수는 단지 ‘물이 올랐다’, ‘더욱 과감해졌다’ 등의 표현만으로 감당되지 않는 존재가 돼버린 거다. 그건 어쩌면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의 말처럼 “편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혜수 스스로가 “작은새와 이슬 캐릭터 중 비중이 더 작은 이슬을 선택한 건 지금 내 정서가 이슬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의 마음속에 자유롭고 가벼운 기운이 넘치고 있는 탓일 것이다. <바람피기 좋은 날>과 <좋지 아니한가>를 연달아 마치고 <열한번째 엄마>를 찍느라 턱선이 아예 뾰족해진 김혜수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넉넉하게 보이는 것도 그런 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새로운 영토를 향해 가고 있음이 분명한 이 22년차 여배우의 속을 알기 위해 <씨네21>은 그를 오래전부터 잘 알아왔거나 함께 작업을 했던 영화인 10명에게 ‘당신이 김혜수에 관해 알고 싶은 것 한 가지’씩을 물어봤다. 자, 그럼 바람처럼 자유롭고, 새털처럼 가벼운 김혜수와의 10문 10답을 시작한다.
질문 1. <바람피기 좋은 날>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장문일/ <바람피기 좋은 날> 감독) =시나리오가 좋아서 선택한 거죠. 사실 이슬이나 작은새, 두 여자 캐릭터 모두 실제의 나와는 비슷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냥 여자로서 공감이 가요. 정말 잘 썼더라고요. 그리고 캐릭터들이 영화적이지 않고 너무 현실적이에요. 사실 영화에서는 아찔한 로맨스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감독님은 약간 인간의 본질적인 것들을 좀더 살짝궁 건드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것을 무겁게 풀지 않았다는 게 더 마음에 들었고요.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 여쭤본 것도 그거였어요. 이 영화의 방향은 두 가지가 될 수 있다. 하나는 정말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방향, 또 하나는 좀더 유쾌하고 가볍게 그리면서 이면의 묵직한 것을 드러나지 않게 그려서 재밌게 보는 사람은 재밌게 보고, 그 여운을 느끼는 사람은 여운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었더니 기획은 전자로 했지만 찍을 때는 후자를 선택하겠다고 하기에 바로 하기로 결정했어요.
질문 2. 팜므파탈, 섹시 등의 키워드로 불릴 때 기분은 어떤가요.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윤상미/ <신라의 달밤> 이후 꾸준히 함께 온 스타일리스트) =팜므파탈은 <타짜> 정도 아닌가요. <타짜>의 정 마담은 굉장히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팜므파탈이죠. 잘 따져보면 캐릭터 자체가 섹시한 경우는 별로 없어요. <얼굴없는 미녀>는 굳이 말하면 팜므파탈에 조금 근접한 역할이긴 한데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그 캐릭터가 섹시해야 한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고요. 보통 연예뉴스를 보면 ‘김혜수 섹시미 과시’류의 기사가 나오는데, 그건 영화나 드라마의 캐릭터와 상관없이 그냥 익히 알고 있는 김혜수의 대외적인 이미지, 이를테면 시상식에서나 행사장에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넘겨짚는 것 같아요. <바람피기 좋은 날>의 이슬 같은 캐릭터도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자유로운 마인드를 가지기도 했지만, 누구든지 ‘저 여자 진짜 섹시하구나’ 할 필요는 없거든요. 심지어 이번에 <열한번째 엄마>를 찍고 있는데, 이 영화는 술집에서 거친 인생을 산 여자가 우연한 기회에 한 아이의 실질적인 엄마가 돼준다는 얘기예요. 술집장면은 안 나오거든요.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윤락 생활… 김혜수의 섹시한…’ 식으로 보도하더라고요. 윤락녀가 뭐 다 섹시한가요. 그리고 제작사도 그런 의도가 없고, 실제 캐릭터가 그렇지도 않거든요.
질문 3. 바야흐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생각이에요. 상도 많이 받고. 자신의 무언가가 바뀐 것인가요,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인가요. (정윤철/ <좋지 아니한가> 감독) =흠, 그럼 제1의 전성기는 언제였나. (웃음) 그리고 상 많이 안 받았어요. 제가 시상식을 많이 진행해서 상을 많이 받은 걸로 아는 거 아닌가요. (웃음) 하여간 운도 좋았고 무언가 변화하기도 했겠죠. 아무래도 나이를 먹는데, 지금 이 나이에 성장한다는 표현이 아주 적합하진 않지만 하여간 성장하잖아요. 그리고 스스로도 어릴 때보다는 좀더 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면이 있을 것이고요. 그런 준비가 돼가는 거죠. 그런 와중에 좋은 기회를 만난 것이죠. 좋은 영화에서 좋은 캐릭터를 연기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보너스로 관객도 많이 봐줬고요. 아무리 내적인 준비가 돼도 좋은 기회가 없으면 창구가 없는 것이니까 결국 개인적인 성장과 운이 맞물렸던 것 같아요. 아무튼 영화 한편으로 갑자기 뭔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잘해야죠.
질문 4. 우린 13년째 파트너이자 친구로 지내고 있잖아요. 매니저로서의 나와 친구로서의 나는 어떻게 다른가요. (박성혜/ 싸이더스HQ 이사) =성혜씨는 공적으로는 파트너이고 개인적으로는 친구 맞죠. 그렇게 오래됐나. 어쨌건 성혜씨와는 일이 우선인 것 같아요. 일에서 신뢰가 쌓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서로 오픈할 수 있는 사이가 됐던 것 같아요. 제가 박성혜라는 사람을 인간적으로도, 또 파트너로도 신뢰하는 건, 그리고 다른 매니저와 차별된다고 생각하는 건 비즈니스적으로 뛰어나다는 이유 같은 것은 아니에요. 성혜씨는 자기 배우의 인간적인 본질, 배우로서의 본질에 근접한다는 거죠. 매니저와 배우의 관계는 아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성혜씨는 대외적인 성공, 인기 이런 것보다는 이 배우가 원하는 방향, 이 배우가 연기자로서 갖고자 하는 본질, 정체성 여기에 근접하기 때문에 일할 때는 한마음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런 그녀이기 때문에 배우 김혜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죠.
질문 5. <타짜> 현장에서나 다른 곳에서나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경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원래 배우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최동훈/ <타짜> 감독) =(하이톤으로) 전 너무 부러워요. 사실 <타짜>를 하면서 저에게 좋았던 건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도처에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그런 분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잖아요. 그 자리가 저에겐 너무 소중했어요. 그들은 인간적으로도 성숙하고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양질의 인간이 양질의 배우가 된다는 말이 맞아요. <타짜> 하면서 좋은 배우들 만나서 느낀 게 뭐냐면 그들은 이미 갖고 있지만 저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거예요. 정말 한없이 부럽고. 그런 배우들과 한 공간에서 연기를 한다는 게 너무 행복하고. 저는 제가 배우라는 사실에 대해 엄청나게 자긍심을 갖거나 하는 편은 아니에요. 물론 배우라는 직업은 너무 소중하죠. 일을 하면서 철이 들었으니까. 그럼에도 다른 배우들을 볼 때는 제가 배우인 걸 잊어버리는 거예요. 사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나의 배우로서의 재능이 굉장히 제한적이구나, 뭐 이런 생각을 심하게 했던 것 같아요. 자학까지는 아니어도 약간의 자괴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질문 6. <분홍신> 작업할 때도 ‘나는 연기를 못한다’ 식의 발언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자신의 연기에 대한 스스로의 평점이 너무 낮은 것 아니에요. (김조광수/ <분홍신> 제작한 청년필름 대표) =돌이켜보면, 나 스스로 평점을 낮게 주기도 했고, 다른 분들도 그랬던 것 같은데요. 그렇게 낮은 평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굉장히 제한적이고 전형적인 모습들만 보여줬기 때문인 듯해요. 전형적인 연기를 지속적으로 해온 배우의 핸디캡이 있을 수밖에 없죠. 나의 전형성은 제가 제일 잘 알잖아요. 그리고 그건 나 스스로가 바로잡기가 가장 힘들어요. 그런 핸디캡이 있으면서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답답함이 꽤 오래갔던 것 같고요. 그렇게 연기자로서의 나의 재능이 이 정도까지라는 것을 느낄 때의 답답함, 실망감 같은 게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건 정말 내가 잘한다, 내가 누구보다 낫다, 이렇게 생각도 해요. 저는 정말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작품을 할 때도 최선을 다해요. 그 순간 내가 가진 만큼 모두. 그래서 그것밖에 안 되냐고 하면 할 말은 없는데, 저는 나니까 이만큼 하는 거다, 그런 생각도 분명히 해요.
질문 7. 나는 지금의 혜수가 너무 좋거든요. 마음이 열려 있는 상태고 편안하잖아. 결국 출연이 무산되긴 했지만 <바람난 가족> 때 노출 연기를 하기로 결정한 게 계기가 되진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하여간 10년 뒤에도 그렇게 열려 있는 배우로 살고 있을까. (오정완/ <쓰리> 제작한 영화사 봄 대표) =잘못 알려져 있지만 <바람난 가족>은 제가 찬 게 아니라 그쪽에서 절 거부한 건데요, 하여간 그때는 아, 이 캐릭터는 노출 연기를 할 만한 가치가 있어, 이런 식의 생각을 했었죠. 그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얼마나 많은 캐릭터들이 있는데 굳이 노출하는 캐릭터를 해야 하나, 노출을 한다고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을까, 라고. 저는 노출에 대해 기본적인 두려움은 없어요. 그렇다고 많이들 오해하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난 건 아니고요. (웃음)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났으면 돈 받고 사진 찍어서 팔면 되죠. 그냥 좀 편해진 것 같아요. 그리고 나 혼자 폭을 넓히려 한다고 되는 건 아니죠. 나를 선택하는 영화인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달라질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10년 뒤라…. 그건 모르죠. 저도 일부러 닫고 싶진 않지만 그때의 상황과 현실과 무관하지 않겠죠.
질문 8.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활동해왔는데 혹시 다른 분야에도 관심이 있어요. (황정민/ 배우·같은 소속사의 절친한 동갑내기) =뮤지컬, 연극 다 관심있어요. 사실 배우는 연기를 할 뿐이잖아요. 특히 우리나라처럼 시장도 좁고 기회도 별로 많지 않은데 장르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연기자는 어떤 캐릭터든 연기할 수 있게끔 항상 준비를 하는 게 일상이 돼야 하지만 실제로 연기를 하지 않으면 감을 잃어요. 그런 창구들이 계속 개발돼야 하는데 정말 그런 면에서는 막혀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그럼에도 새로운 매체는 조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제가 유일하게 나온 연극이 1992년의 <신의 아그네스>였는데, 엉망으로 했어요. 여러 가지 면에서. 경험이라고 하기에도 제가 너무 부실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제 핸디캡인데, 성량이 많이 부족해요. <신의 아그네스>를 하면서 느꼈는데 공연 딱 2회를 하니까 목이 쉬었어요. 그때 이비인후과 치료를 여러 번 받았는데, 원래 목이라는 게 많이 쓸수록 트여야 하는데, 저는 많이 쓰면 목이 상할 수 있는 아주 나쁜 케이스래요.
질문 9. 미래상이 궁금해요. 30년 뒤엔 어떤 모습의 배우 또는 인간이 될 것으로 그리고 있나요? 어떤 모습이길 바라고 있나요. (주선/ 15년 전 김혜수와 배우와 스크립터로 만난 이후 계속 관계를 맺고 있는 방송계 선배) =30년 뒤에? 뭐야 언니, 내년도 모르는데. (웃음) 잘 모르겠어요. 그때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르겠고. (웃음) 저의 순도가 최대한 손상되지 않게 노력할 거고요, 그리고 배우라는 것은 결국 두 번째 문제죠.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인간 김혜수가 좀더 풍요롭게 좀더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 힘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갖고 싶어요. 그건 물질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다른 모든 것 말이에요. 하여간 지금보다 나았으면 좋겠어요.
질문 10.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그러니까 부모님, 친구, 애인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100% 쏟는 편인가요. (이민기/ 배우·<바람피기 좋은 날>에서 이슬의 짝으로 나온 대학생 연기) =얘가 어려서 이런 엉뚱한 질문을 하고 그래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폭은 좀 좁지만, 깊이로는 꽤 깊은 편이에요. 저는 기본적으로 마음을 나누는 사람한테는 100%까지는 몰라도 거의 열려 있어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올인이에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저에겐 좀 특별한 사람이고, 그들에게도 저는 특별한 존재일 거예요. 정말 소수지만, 뭐랄까… 깊게 많은 것을 나누죠. 그러니까 이슬과는 좀 다른 거죠. 저는 일단은 정말 애정을 느끼면 통제가 잘 안 돼요. 저는 그 방식이 맞는 것 같아요. 혹시 상처나 받지 않을까 하면서 재고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걸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