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스쿠프> 사건의 전말이 중요하지 않은 희극
김혜리 2007-01-31

‘런던 연쇄살인 미스터리’를 가장한 우디 앨런풍의 스낵.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쿠프>는 <매치 포인트>(2005)에 이어 우디 앨런 감독이 런던에서 연출한 두 번째 영화다(앨런은 런던에서 세편의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매치 포인트>와 <스쿠프>는 동시상영으로 관람하면 재미있을 법한 짝이다. 배우 스칼렛 요한슨은 두 영화에 모두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데 우디 앨런은 그녀의 매력을 두 영화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찬양한다. <매치 포인트>와 <스쿠프>의 모티브가 되는 범죄는 유사하다. 말하자면 “출세에 거치적거리는 정부(情婦) 제거하기”인데 <범죄와 비행>에서도 같은 악행이 등장한 바 있으니 우디 앨런은 상습범이다. <스쿠프>와 <매치 포인트>에서는 영화 <젊은이의 양지>로 각색된 T. 드라이저의 소설 <아메리카의 비극>을 대놓고 인용하는 대목도 눈에 띈다. 그러나 두 영화의 모양새는 대조적이다. 살인한 자가 단죄받지 않고 풍족한 삶을 이어가는 <매치 포인트>는 스산한 비극의 인상을 남겼다. 반면 범인이 죗값을 치르는 <스쿠프>는, 사건의 전말이 중요하지 않은 희극이다.

저널리즘을 전공하는 미국 대학생 산드라(스칼렛 요한슨)는 방학을 맞아 런던 상류층 친구 집에 머물며 명사의 인터뷰를 시도하지만 성과가 없다. 우연히도 무방비한 관능이 넘쳐 흐르는 그녀는 유명 영화감독을 취재하러 갔다가 수첩은 꺼내지도 못한 채 얼떨결에 섹스만 치르고 돌아오는 촌극을 벌이기도 한다. 마술사 시드니(우디 앨런)의 쇼를 구경간 산드라는 무대 위로 불려 올라가 ‘차이니즈 박스’(사람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게 하는 속임수 상자)에 들어갔다가, 최근 사망한 저널리스트 조 스트롬벨(이안 맥셰인)의 유령을 만난다. 저승 가는 배에 동승한 여자가 귀띔한 특종(scoop) 제보가 아까워 잠깐 이승에 돌아온 조는, 런던을 뒤흔들고 있는 여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라이먼 경의 아들 피터인 것 같다며 산드라에게 후속 취재를 부탁한다. 필생의 기회를 잡은 산드라는 주저하는 마술사 시드니를 끌어들여 부녀로 가장한 다음 피터 라이먼(휴 잭맨)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나무랄 데 없는 귀족 청년 피터의 구애는 산드라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우디 앨런 영화에 익숙한 관객의 눈에 <스쿠프>는 전작들의 자투리 천으로 기운 조각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범죄를 코미디의 동력으로 끌어들이는 특정한 구도는 <맨하탄 살인사건>이나 <스몰 타임 크룩스>와 비슷하고, 마술쇼에서 벌어진 초자연 현상이 내러티브의 논리를 지탱하는 설정은 <뉴욕 스토리>나 <옥전갈의 저주>가 사용한 아이디어다. 게다가 <스쿠프>의 플롯은 언급된 전작들에 비교해 관절이 허약하다. 산드라는 왜 삼류 마술사 시드니에게 ‘와트슨’ 역할을 구태여 부탁하는지, 절대 손해보지 않는 인생관을 가진 귀족 피터가 어째서 산드라와 시드니의 접근을 관대하게 허락하는지 설득이 미흡하다. “서부극이라도 억지로 시켜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게 닦달해야 한다”는 극언으로 앨런의 노쇠와 매너리즘을 비판했던 평론가들이라면, 호평받은 전작 <매치 포인트>가 우연이었다고 의기양양할 만하다. 그러나 우디 앨런의 창의력이 고갈됐다는 단언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스쿠프>의 작정한 가벼움에 있다. <매치 포인트>가 풀스윙이라면 <스쿠프>는 번트다. 앨런은 여기서 한손을 묶고도 할 수 있는 작업을 여흥 삼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몇개의 코드 진행을 서두에 선보인 다음 코미디와 로맨스, 미스터리는 관객을 싣고 저절로 흘러간다. 베르디의 아리아를 삽입해 개인의 성격과 감정에 동그란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매치 포인트>와 대조적으로 <스쿠프>는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등 발레 음악으로 흥을 돋우며 일사천리 리듬을 탄다. <스쿠프>가 집중하는 척하는 살인의 추리는 감독에게나 관객에게나 관심사가 아니다. 비스듬히 어긋나면서도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스칼렛 요한슨과 우디 앨런의 별난 스크루볼코미디가 즐거움의 요체다. 스칼렛 요한슨이 분한 산드라는 내로라하는 현실의 여성 언론인보다 여기자의 스크린 이미지인 캐서린 헵번과 로잘린드 러셀을 동경한다. <매치 포인트>에서 노력도 헛되이 불운을 맞는 캐릭터였던 요한슨은 <스쿠프>에서는- 마치 앙갚음을 하듯- 방심하고 살다가 행운의 세례를 받는다. 한편 안경 쓴 여성이 ‘미운 오리 백조 되기’ 식의 변신없이 영화 전편에 걸쳐 온전한 인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은 <스쿠프>가 주는 보너스다.

우디 앨런이 분한 마술사 시드니는 “유대교였지만 나이 들면서 나르시시즘으로 개종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체중을 묻는 말에 “고뇌가 에어로빅이라 1그램도 안 찐다”고 해명한다. 우디 앨런은 시드니를 우리가 아는 우디 앨런과 구별된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전혀 수고하지 않는다. 시드니라는 인물은 앨런이 스크린 안에 들어서기 위한 점잖은 핑계에 불과하며, 관객도 그 점을 용인한다. 시드니는 <애니씽 엘스>의 도벨(우디 앨런)이 그랬듯이, 젊은 여배우와의 로맨스를 다른 연기자에게 양보하고, 사건을 중계하며 토를 다는 역할을 수행하다가 종막이 오기 전에 홀연 사라진다.

우디 앨런이 맨해튼을 떠난 일은 떠들썩한 뉴스였지만 그렇다고 앨런의 런던발 근작 두편이 영국 신분사회를 연구하고 있다는 해석은 과하다. <매치 포인트>와 <스쿠프>가 그리는 런던 상류사회의 우아한 거실과 별장, 갤러리와 클럽은 뉴욕 시절 앨런의 영화가 머물렀던 중상층 지식인들의 아늑한 세계에서 그리 멀지 않다. <스쿠프>는, “웃음이 뭘 구원할 수 있다고는 추호도 믿지 않는다. 그저 주의를 잠깐 돌리게 유도할 뿐이다”라는 우디 앨런의 지론을 가장 가벼운 터치로 실현한 간주곡이다. 평판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강약 중강약을 반복하며 세금 내듯 영화를 만들고 있는 노장의 일보 일보는 실망에 앞서 안도감을 자아낸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을 잃은 지금은 더욱. 친애하는 우디 앨런의 큐사인에 따라 짐짓 크게 폭소하며, 우리는 이제 웃는 동시에 무엇인가를 그리워하고 있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