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의 사연. 오후 2시경 남자친구와 함께 극장을 찾은 그녀는 <올드미스 다이어리_극장판>을 보기 위해 시간표를 살펴보지만 상영시간이라고는 맨 마지막 회인 자정뿐이다. 애써 다른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건만 이번에는 하루 한회뿐인 조조 상영이 일찌감치 끝나버린 상태. 커플은 결국 3개관에서 하고 있는 다른 영화를 선택했다. L씨의 사연. <오래된 정원>을 기대작으로 꼽고 개봉을 기다려오던 그는 개봉 첫주에 재빨리 인터넷으로 시간표를 확인해보지만, 하루 상영은 3회뿐이다.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 몇 차례 눈으로만 시간표를 확인하던 그는 한주 뒤 모든 멀티플렉스에서 영화가 종영됐음을 알게 됐다.
특정 영화를 보기 위해 특정 영화관을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단관에서 멀티플렉스 형태로 극장 구조가 변화하면서 과거에 비해 비교적 손쉽게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지만, 동시에 교차상영이라는 또 다른 상영방식이 등장했다. 이른바 “잘나가는” 영화는 보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들은 관람하는 것이 지극히 불편해지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교차상영의 시초가 언제, 어디였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하나의 극장이 여러 배급사를 상대하면서 생겨나게 된 방식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롯데시네마의 한 관계자는 “극장마다 스크린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배급사들은 모두 자기 작품을 걸어주길 원하지 않나. 종영해야 할 시점의 영화 한편을 반으로 줄이고, 새로운 영화 한편을 반으로 받아 한관에 넣는 식의 절충안에서 교차상영이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성수기에는 개봉 첫주부터 교차상영
특수한 경우에 속했던 교차상영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게 된 것은 대략 2∼3년 전부터로 와이드 릴리즈가 일반화되던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최대한 많은 스크린을 확보해서 개봉 첫주에 승부를 봐야 하는 상황이 근본적인 이유인 것 같다. 개봉하는 영화 편수도 늘었는데, 모두가 300관을 잡으려 하면 교차밖에 답이 안 나온다”라고 말한다. 한 배급 실무자는 “200관을 잡는다 치면 어떻게 잡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저 숫자 채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친다. 195개관이 확정되었을 경우, 무조건 5개는 늘려서 200개를 맞춰야 하는 것이 현재 배급사들의 상황이다. 하루 3회 상영은 차라리 무난한 편이고, 하루에 한회를 하더라도 일단 넣어달라고 하는 거다”라고 털어놓는다. 스크린 수를 둘러싼 경쟁이 과열되고, 외형적인 실적에만 초점을 맞추는 풍토가 조성되면서 교차상영이 일반화됐다는 것이다.
특히 신작들이 매주 쏟아져나오는 성수기에는 개봉 첫주부터 교차상영을 하는 상황도 적지 않게 발생한다. “솔직히 4, 5년 전만 하더라도 개봉주에는 정상적으로 상영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한 직배사 관계자의 설명은 최근 극장가 상황에 정확히 적용된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개봉주에는 <박물관이 살아있다!> <007 카지노 로얄>을 포함해 5편의 신작이 쏟아졌고, 1월 둘쨋주에는 <묵공> <허브> <블러드 다이아몬드> 등 무려 7편이 극장가를 찾았다. 경쟁이 극심한 상황에서 <올드미스…> <오래된…> <언니가 간다> 등 다수의 영화들이 교차상영의 운명을 맞이했다. 메가박스의 한 관계자는 “아무리 멀티플렉스라고 해도 극장마다 영화관이 평균 7, 8개 정도인데, 신작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기존에 상영하고 있던 것들을 전부 종영할 수도 없고, 배급사와의 관계 때문에 신작을 안 걸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다보면 고육지책으로 교차상영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배급사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싸우지 말고 개봉 시기 좀 나눠주세요, 부탁을 한다. 근데 항상 같은 시기에 전부 다 개봉하지 않나. 그러면서 나중에 왜 우리 영화는 많이 안 해주냐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CGV 관계자의 말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물량 증가와 개봉 시기의 편중이 교차상영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작은 영화에게 교차상영은 독인가, 약인가
물론 어떤 영화가 교차상영으로 넘어가게 되느냐에는 극장의 상업 논리가 작용한다. 멀티플렉스는 보통 한주 단위로 프로그래밍이 이루어지고, 목요일 개봉 영화는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간의 스코어를 바탕으로 주말 상영시간표가 짜여진다. 주말 동안의 스코어와 예매율을 종합해 다음주 초의 시간표가 조정되는 순서의 수순이다. CGV, 메가박스, 롯데 등 멀티플렉스 관계자들은 “극장은 기본적으로 이윤을 추구한다. 관객이 넘치는 영화를 한관에서만 상영하고, 객석이 텅텅 비는 영화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일제히 주장한다. 어차피 모든 영화들이 한관을 온전히 차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교차상영은 작은 영화들한테 고루 기회를 제공하는 하나의 방편이라는 입장도 있다. 영화사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는 “교차상영이 무조건 극장의 횡포고 배급사의 횡포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전형적이고 관념적인 비판이다. 교차라는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에 작은 영화들이 0.5라는 공간이라도 확보할 수 있는 면도 분명히 있다”며 “불필요한 피해 의식보다는 교차상영을 적절히 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교차상영이 일반화되면서 작지만 의미있는 영화들, 메이저 배급 라인을 타지 않은 영화들이 수익을 올리기 힘든 구조가 점차 고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영화는 규모가 크지 않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20억, 30억원 정도의 비용이 투입되는 현실에서 교차상영을 통해서는 도저히 수익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 제작사들의 입장이다. 청년필름의 김조광수 대표는 “<올드미스…>는 개봉 첫날부터 교차로 상영됐다. 그것도 1.3.5/2.4.6식의 교차가 아니라 제일 첫회와 제일 마지막 회에 넣는 식의 교차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아무리 스크린을 잡기 힘들다고 해도 그런 식의 개봉을 원하는 영화사는 없을 것 같다”며 고충을 토로한다. 작품의 흥행성을 기준으로 교차상영이 결정된다고는 하지만, 반대로 교차상영 때문에 관객의 선택을 받기가 더욱 힘겨워지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한 배급 관계자는 “안 되면 바로 잘라버리니 영화가 살아남기가 힘들다. 점점 입소문을 타고 사랑받을 수 있는 영화들이 이제는 설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제도의 필요성은 공감, 제도 내용은 의견차 커
제작사와 배급사, 극장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으는 것은 제도적인 장치의 필요성이다. 하지만 어떤 방식의 제도를 마련하느냐에 관해서는 의견 차가 크다. 한 배급 관계자는 “솔직히 멀티플렉스에서 16개관 가진 지점이나 7개관 가진 지점이나 똑같은 수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볼 때면 씁쓸하다. 스크린 독과점 규제법이 마련되면 이런 상황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스크린 독과점 규제법은 시장 논리에 위배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극장쪽은 프린트 수급 조절과 개봉 시기 조정 등이 더욱 시급한 과제라는 태도다.
각자의 논리가 팽팽히 맞서는 상황이지만, 대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인식은 현재와 같은 상황이 모두에게 득이 아닌 실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롯데시네마의 한 관계자는 “극장쪽도 교차상영은 장기적으로 볼 때 문제가 많다. 1명이건 10명이건 해당 시간에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하고, 관객이 원하는 영화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극장은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현재와 같이 영화의 수명이 단축되고, 수익구조가 악화되는 악순환이 해결되지 않는 한 결과적으로 영화 업계 전체는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교차상영은 단순히 유지하느냐, 없애느냐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영화계가 외형적 성장에만 집착하면서 발생한 수많은 문제들 중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는 한 관계자의 말처럼 교차상영은 한국 영화산업의 체질 개선이라는 커다란 그림과도 직결해 있다. 프린트의 효율적인 수급, 스크린의 합리적 배분, 소극장 활성화 등 관계자들의 입가에서 맴돌고 있는 다양한 대안들을 적극적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