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TV드라마가 한국에서도 전성기를 맞고 있다. 공중파를 통해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드라마만 소개되던 과거에 비해 케이블TV의 활성화와 다양한 DVD의 출시 등에 따라 한국에서 ‘미드’(미국 드라마) 팬들이 급속히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열혈 미드 마니아인 불법 다운로드족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한국 시청자가 <CSI> <24> <위기의 주부들> <로스트> <그레이 아나토미> 같은 최신 미국 드라마에 열광하는 데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최근 들어 미국 TV드라마가 ‘혁명’이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나날이 변화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드라마의 과거, 현재, 미래를 미국 현지에서 조망해본다. 아울러 ‘혁명’의 중요한 힘이 된 창조적인 인물들과 한국의 영화인들이 눈여겨보고 있는 미국 드라마를 알아봤다. 또 한국에 아직 공식적인 루트로 소개되지 않았으나 돌풍을 일으킬 여지가 있는 미국 드라마를 소개하고, 한국에서의 시리즈 드라마의 가능성 또한 타진해본다.
할리우드 인력 수입, 거대한 해외시장과 새로운 시청패턴으로 양적·질적 성장
“지금은 미국 TV의 황금시대다.” 미국 이십세기 폭스TV 게리 뉴먼 회장의 선언은 TV라는 매체가 흥성하고 있음을 일컫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반대다. TV 광고시장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으며, 그 자리를 인터넷을 비롯해 디지털비디오레코더(PVR), DVD, 아이팟 등 새로운 매체가 차지하고 있다. TV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황금시대’ 운운하다니. 하지만 뉴먼이 황금시대라 부른 것은 TV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나날이 융성하고 있는 미국의 TV시리즈, 그러니까 드라마다.
그가 말한 황금시대의 실체는 미국의 <TV가이드>만 펼쳐도 확인할 수 있다. TV 편성표 하단의 두툼한 허리를 차지하는 프라임타임, 그러니까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의 프로그램을 훑어보자. <ABC>에는 <그레이 아나토미> <위기의 주부들> <보스턴 리걸> <어글리 베티> 등이 포진해 있고, <CBS>에는 ‘CSI’ 형제들, 즉 <CSI> <CSI: 마이애미> <CSI: 뉴욕>을 비롯해 <샤크> <크리미널 마인즈> <고스트 위스퍼러> 등 화려한 라인업이 드러난다. 또 <NBC>에는 <히어로즈> <마이 네임 이즈 얼> <스크럽스> <오피스> <라스베가스> 등이 있고, FOX에는 <하우스> <본즈> <O.C> <24> <심슨 가족> 등이 적혀 있다. 여기에 <HBO> <UPN> <A&E> <SCI-FI> 등 케이블의 주요 채널까지 추가한다면, 드라마들의 제목만 읊더라도 이 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 드라마가 시청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쇼 <댄싱 위드 더 스타즈>와 미국의 국민스포츠인 NFL 풋볼 중계방송을 제외하면 상위권은 모두 드라마들이 장악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까지의 2006~2007 시즌 중간집계에 따르면, <위기의 주부들>이 2100여만명의 시청자를 확보해 2위, <CSI>가 2천만명으로 4위를 차지했고, 그 뒤를 <그레이 아나토미> <CSI: 마이애미> <로스트> <크리미널 마인즈> <CSI: 뉴욕> 등이 버티고 있다. NFL이 슈퍼볼을 향한 본격 행보를 시작했음에도 상위 20위 중 드라마는 13개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것은 <CSI>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드라마가 상위를 차지하는 게 한국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현상 아니냐고? 사실, 미국 드라마는 오랫동안 침체였다. 미국 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베이워치> 이후 미국 드라마는 별다른 후속 작품이 없었다. 1990년대에는 <사인펠드> <프렌즈> 같은 시트콤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서바이버> <아메리칸 아이돌> 등 리얼리티쇼가 인기를 구가했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시리즈 드라마는 TV에서 찬밥 신세였다. 이 와중에 케이블 채널 <HBO>가 <섹스 & 시티> <소프라노스> 등을 선보였고 2001년에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방송했지만, 미국 드라마의 판도를 일거에 바꿔낸 작품은 따로 있었다. 모두를 놀라게 한 핵무기급 드라마는 공중파 채널인 <CBS>에서 선보인 <CSI>였다. 2000년 10월 방송을 시작한 이 시리즈는 브룩하이머 특유의 액션과 함께 그동안 다뤄지지 않은 경찰 검식반의 수사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줘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CSI> 오리지널, 즉 <CSI: 라스베가스>는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ABC>의 의학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와 시청률 1위를 다투고 있으며, <CSI: 마이애미>는 미국 내에서 1800만명의 시청자를, 세계적으로는 4천만명 이상의 시청자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 격이라 할 수 있는 그리섬 반장 역의 윌리엄 피터슨은 “애초 우리는 이 시리즈가 <X파일>이나 <웨스트 윙> 같은 열정적인 시청자의 틈새 정도를 파고들 것이라 생각했지만, 모든 분야의 엄청난 시청자가 이 시리즈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그의 자화자찬성 발언이 아니더라도 <CSI>는 그동안 공중파TV에서 좀처럼 선보이지 않던 특별한 소재- 트랜스젠더, 페티시 등까지- 를 과감하게 선보였고, 제한된 수의 출연진들에게서도 풍부한 이야기를 끌어냈으며, 풍부한 제작비를 바탕으로 CG 등 파격적인 비주얼을 보여주는 등 TV드라마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뜩이나 채널 수가 늘어나는 데 비해 한정된 시청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경쟁을 펼치던 방송사와 제작사에 <CSI>는 닳을 대로 닳은 시트콤과 소재의 한계에 봉착한 리얼리티 쇼를 대신할 수 있는 황금 열쇠였다. 연간 약 600억달러로 추정되는 미국 TV시장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펼치던 방송사와 제작사는 제작비가 많이 들더라도 좀더 큰 시장을 바라보면서 작가와 프로듀서들에게 좀더 창의적이고, 기존 드라마의 포맷에서 벗어난 작품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로스트>와 <24> <위기의 주부들>처럼 파격적인 드라마가 나올 수 있었던 것 또한 이런 토양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드라마 혁명’의 안정기에 접어든 현재는 질적 수준 또한 크게 올라갔다. 지난해 피바디상을 받은 <배틀스타 갈락티카>는 SF 장르의 컬트로 남기보다는 강제 군사점령과 자살폭탄 테러범 등 현대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중에 반영해 미국사회의 양분화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평론가들로부터 ‘최고의 TV시리즈 중 하나’로 평가받았고, <와이어>는 가정은 물론 이웃, 학교, 사회로부터 모두 소외된 볼티모어시의 흑인, 빈민층, 청소년 4명의 이야기를 다뤄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이나 “<율리시스>에 버금가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캐릭터 분석이 돋보이는 <프라이데이 나이트 라이츠>와 <하우스> <덱스터> <클로저> <로마> 등의 시리즈도 시청자뿐 아니라 평론가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할리우드 이민자들 TV 대륙의 토양을 바꾸다
하지만 황무지에 우량종자를 심는다고 좋은 열매가 맺힐 수는 없는 법. 미국의 드라마 혁명 이면에는 척박한 대지를 기름지게 일군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 시기 TV라는 신대륙을 개척하려 한 사람들은 비슷한 동네인 할리우드 영화계 인사들이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CSI>의 성공 이후 <FBI 실종수사대> <클로즈 투 홈> <콜드 케이스> <저스티스>를 제작했고, 리들리 스콧과 토니 스콧 형제 또한 2005년 <넘버스>를 시작으로 TV라는 대륙에 깃발을 꽂았다. 제임스 카메론은 <다크 앤젤>을, <아마겟돈> 등의 시나리오를 썼고 훗날 <미션 임파서블3>를 감독하게 되는 J. J. 에이브럼스는 <앨리어스>를 제작했다. 또 시리즈는 아니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는 거대한 제작비를 들여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테이큰>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모든 작업은 TV라는 신개발지를 점령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지만, “장편영화의 경우 2시간 정도의 시간에 한정되지만, TV시리즈는 하나의 유기체로 캐릭터나 스토리의 발전과 변화를 충분히 기획할 수 있다”는 리들리 스콧의 말처럼 2∼3시간 안에 모든 이야기를 녹여야 하는 영화의 틀을 벗어나기 위한 도전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할리우드 특급 시나리오작가 폴 해기스마저 <블랙 도널리스>라는 시리즈에 참여했다.
영화배우들도 브라운관 속으로 속속 도착했다. 그때까지 TV는 영화계 진출을 위한 디딤돌이거나 할리우드 ‘퇴물’들의 휴게소에 불과했지만, 막대한 투자가 이뤄지고 보통 영화보다 짜임새있게 만들어지는 시리즈가 늘어나면서 쌩쌩한 ‘현역’들의 나들이도 잦아졌다. <레스큐 미>와 <위즈>에서 각각 주연과 제작을 함께 맡고 있는 데니스 리어리와 메리 루이스 파커는 테이텀 오닐, 수잔 서랜던, 마리사 토메이 등을 에피소드에 끌어들이기도 하는 적극적인 인물이며, <더 쉴드>에는 글렌 클로스와 포레스트 휘태커가 출연했고, <배틀스타 갈락티카>에는 에드워드 제임스 올모스, 메리 맥도넬, <내 이름은 얼>에는 제이슨 리와 제이미 프레슬리, <고스트 앤 크라임>에는 패트리샤 아퀘트, 제이크 웨버, <24>에는 키퍼 서덜런드, <보스턴 리걸>에는 제임스 스페이더 등이 등장해 이들 중 일부는 골든글로브와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샤크>의 제임스 우즈, <제리코>의 스킷 울리히, <클로저>의 카이라 세드윅, <세이브드>의 톰 에버렛, <스튜디오 60 온 선셋 스트립>의 아만다 피트와 매튜 페리, 시트콤 <30 록>의 알렉 볼드윈 등도 비슷한 경우다.
광대한 해외시장, 안방극장의 새로운 금광
이런 인력 재배치 속에서 안방극장에는 ‘42분짜리 블록버스터영화’가 넘실거리게 됐지만, 폭증한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했다면 미국 드라마 혁명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NBC>의 <납치>가 2006년 가을 첫 시즌 만에 종영된 것도 에피소드당 240만달러라는 막대한 제작비에 비해 시청률이 좀처럼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1시간짜리 미국 드라마의 에피소드당 제작비는 250만달러로 추산되는데, 실제로 제작을 맡는 스튜디오들은 방송사로부터 오직 65%만을 회수한다. 결국 이 같은 적자는 시즌마다 4500만~5500만달러까지 쌓이게 된다. 만약 이러한 적자가 그대로 누적됐다면 드라마고 뭐고 다 집어치웠겠지만, 이들 앞에는 극적인 반전을 가져오는 거대한 시장이 존재한다. 미국 내 재방송 판매와 해외 판매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해외시장은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쏠쏠한 돈주머니 역할을 한다. <납치>는 미국 내 부진에도 불구하고 영국 <채널4>로부터 에피소드당 80만 달러에 팔렸고, <샤크>는 해외 바이어들로부터 에피소드당 100만달러 이상의 제의를 받고 있다. 시트콤 <내 이름은 얼>은 회당 50만달러 이상을 호가하고 있는데 불과 5년 전만 해도 인기 시트콤의 해외 판매가격은 20만달러 정도였다. <어글리 베티>는 남미의 드라마 <Yo Soy Betty, la Fea>를 리메이크했지만, 유럽은 물론 스페인어권으로 역수출까지 했을 정도다. <CSI: 마이애미>가 새 시즌의 첫회를 리우데자네이루를 배경으로 한 것도 거대한 남미시장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타임>에 따르면 일부 시리즈의 경우 3년 전에 비해 판권 가격이 50~70% 이상 올랐다. 이에 따라 미국 드라마가 지난해 벌어들인 해외 판권 판매액은 30억달러에 달했다. 전세계적으로 확산 중인 케이블, 위성방송 채널들이 드넓은 방송시간을 메우기 위한 콘텐츠를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고, <로스트> <24> <위기의 주부들> 등으로 미국 시리즈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아이팟, DVR, 유튜브… 시청 패러다임이 바뀐다
최근 등장하는 미국 드라마의 특징은 ‘네버 엔딩 스토리’라는 점이다. 보통 미국 드라마는 에피소드별로 기승전결이 존재하는 완결된 구조가 일반적이었지만, <24>와 <로스트> 이후 이러한 통념은 부서졌다. 시즌 전체, 또는 전체 시리즈를 한편의 긴 서사로 간주하면서 ‘42분(쉴새없이 튀어나오는 광고를 고려한 1시간짜리 드라마의 실제 러닝타임)의 감옥’에 갇혀 있던 작가들은 자유를 얻었다. 좀더 창의적이고 복잡한 구조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여기에는 한 가지 제약이 있다. 이처럼 긴 호흡의 시리즈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매 에피소드를 빠짐없이 시청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방송이 시작되기 직전 TV 앞에 마냥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없는 현대 미국인들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기술 덕분에 이 같은 장애는 극복되고 있다. 에피소드당 1.99달러만 내면 드라마 동영상을 볼 수 있는 아이팟, 방송 스케줄에 맞춰 전체 시리즈까지도 예약 녹화할 수 있는 비디오인 DVR, 케이블 채널의 ‘온 디맨드 서비스’, ‘유튜브’(YouTube.com) 등의 웹사이트 서비스, 방송사 인터넷 사이트의 에피소드 동영상 서비스 등은 방송 시간을 놓친 시청자들로 하여금 시리즈의 모든 내용을 파악하게 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물론 이 새로운 매체가 만들어내는 부가수익도 무시 못한다. e마케터라는 업체는 2007년 방송계의 다운로드에 따른 수익이 6억4천만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또 전 시즌의 에피소드와 각종 서플먼트를 담은 DVD 또한 시청자의 이해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로스트> 시즌 1 DVD 세트는 미국 안에서 120만 세트가 판매됐다.
물론 이 같은 환경을 과신해 무리하게 자본을 투자한 시리즈도 늘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시청자가 적응할 여유도 갖기 전에 수익성 때문에 짧게는 방영 몇주에서 1~2개월 안에 조기종영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006년 가을 시즌만 해도 <납치>와 <스미스> 등 많은 시리즈가 종영됐고, 일부 시리즈들은 방송시간을 변경하거나, 잠정적으로 방영을 중단하기도 했다. 가능성과 작품성은 있지만 이른 시일 내 시청률을 올리지 못한 프로그램들의 희생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환경이라면 90년대 초 시작된 뒤 몇년 동안 시청률이 저조했지만, 수많은 골수팬들을 만들어낸 <X파일>조차 첫 시즌을 채 끝내지 못했을 것이란 이야기도 공공연히 나돈다.
드라마의 황금시대≠TV 황금시대
최근 몇년 동안의 ‘드라마 혁명’을 통해 미국의 ‘시각 소비문화’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TV가 풍부해진 반면 할리우드영화는 보잘것없어졌다”고 불만을 쏟고 있다. 소재, 제작비, 표현 등 모든 면에서 기존의 틀을 벗어난 공중파 드라마와 듣도 보도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와 근친상간에서부터 성기 노출까지 파격적인 주제와 표현으로 무장한 케이블 채널 드라마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속편 시리즈 외에는 별볼일 없는 할리우드영화가 이전만큼 영화(榮華)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게다가 뉴욕 등 대도시를 제외한 미국 내 일반 멀티플렉스 극장의 상영작은 흥행성 오락영화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작품성있는 볼거리를 추구하는 관객이라면 차라리 TV 앞을 어슬렁거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의 ‘드라마 혁명’은 더욱 커다란 혁명적 상황을 예고한다. 그것은 ‘방송-TV의 종말’이다. 아이팟을 통한 아이튠스의 동영상 다운로드가 시작됐을 때 본격화된 이 종말론은 유튜브, IPTV 시대를 맞아 더욱 활개를 치고 있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많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광적인 지지 속에서 인터넷 사이트와 블로그, 팟캐스트를 만들게 한 <로스트>가 이 종말의 시발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급속히 확산되는 개인미디어 환경 속에 놓인 이들 세대를 고려했을 때 거실에서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TV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심슨 가족>의 풍경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지속적인 TV광고의 하락과 새로운 매체의 탄생은 이를 가속화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그 매체가 무엇이든 그 속을 채워넣을 무언가, 즉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혁명기를 맞이한 미국 드라마는 방송이 멸망해도 꾸준히 발전하리라는 것 또한 확실하다. 물론, 그 말엔 ‘당분간’이란 단서가 붙어야 하겠지만.
영국 TV의 미국 침공
미국 TV에 부는 영국 드라마 시리즈 리메이크 열풍
대서양은 그리도 가까운 모양이다. 최근 미국 TV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 중 하나는 영국 시리즈 리메이크 열풍이다. 사실 미국 방송계의 영국 TV 리메이크 열풍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어하는가>(Who Wants to Be a Millionaire) 같은 퀴즈 프로그램이나 <댄싱 위드 스타즈>, 심사위원 사이먼 코웰을 그대로 빌려온 <아메리칸 아이돌>처럼 리얼리티 쇼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영국 TV 리메이크 바람은 드라마와 시트콤에까지 촉수를 뻗히고 있다. <BBC>의 <오피스>가 미국판으로 리메이크되어 성공을 거둔 것을 본격적인 시작으로, 현재는 영국 <itv>를 통해 방영된 소프오페라 <축구선수의 아내들>(Footballer’s Wives)이 미국판으로 제작 중이고,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의 창조자 미첼 허위츠는 영국의 정치코미디 <The Thick of It>을, <폭스TV>와 <NBC>는 <The Vicar of Dibley>와 <I’m With Stupid>를, 쇼타임은 가족드라마 <Cape Wrath>를 <Meadowlands>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할 예정이다. 한술 더 떠서 너무나도 영국적인 코미디 <리틀 브리튼>(Little Britain)이 <HBO>를 통해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은 놀라울 정도다. 노동계급 늙은이들의 연애담으로 가득한 소프오페라와 <BBC>의 명작극장 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영국 드라마는 이제 미국 TV계의 ‘머스트-해브’가 된 듯한 인상이다.
<LA타임스>는 최근 ‘영국 TV가 연못을 일사천리로 건너오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기사를 통해 미국 TV계의 영국 드라마 리메이크 열풍을 짧게 분석했다. <LA타임스>가 지적하는 리메이크 붐의 가장 큰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인들은 더 많은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영국인들은 더 신선해 보이는 아이디어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BBC 아메리카>의 캐슬린 미첼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한 갈증은 현재 최고조에 올라 있다. 미국 TV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히트작을 찾아 헤매고 있다”며 이 같은 움직임을 설명한다. 몸집을 불린 미국 TV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럽과 아시아의 콘텐츠를 빌려오기 시작한 할리우드처럼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강렬한 허기를 느끼고 있다. <NBC> 회장인 안젤라 브롬스태드의 말처럼 모두가 “그물망을 좀더 넓혀서 더 많은 가능성을 찾으려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위험도 당연히 존재한다. 모든 리메이크 시리즈가 <오피스>처럼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BBC>의 인기 시리즈 <커플링>은 지난 2004년 미국으로 건너가 동명의 리메이크작을 탄생시켰지만 오리지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재미가 없었고 시청률도 낮았다. 동일한 언어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언어의 장벽에 부담을 느낄 필요없이 이미 만들어진 훌륭한 콘텐츠를 섭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 TV계의 영국 시리즈에 대한 관심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