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다 가끔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뭐야, 이거 TV드라마 같잖아.” 이럴 때 TV드라마란 말은 영화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허황된 스토리의 영화를 보면서 “이거 만화네. 만화”라고 말할 때처럼. 그러나 만화나 TV드라마가 수준 낮다는 인식이 옳은 것은 아니다. 만화가 독자적 대중예술장르인 것처럼 웬만한 영화보다 나은 TV드라마도 존재한다. 특히 최근 국내 방영되는 미국 TV드라마는 근자의 할리우드영화보다 흥미로울 때가 많다. <CSI>를 보면서 영화로 만든 요즘 범죄스릴러물이 오히려 시시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케이블채널에서 <CSI 데이>를 시청하느라 하루를 보내다 보면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제 영화의 시대가 끝난 것 아닌가?
변화는 오래전에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80년대 중·후반부터 불어닥친 미디어 기업간의 인수, 합병은 거대 미디어 그룹의 탄생을 재촉했고 영화와 방송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여기에 네트워크와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더해져 영화의 독자적 존재양식은 90년대 이래 꾸준히 의심받아왔다. 할리우드가 창의력이 부족한 속편 제작에 몰두하는 동안 영화는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수준 높은 미국 드라마가 양산되는 모습을 보면 영화의 죽음이 터무니없는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국내 상황을 봐도 <CSI> <위기의 주부들> <그레이 아나토미> <로스트> 등이 열혈 시청자를 확보했고 미국의 최신 드라마를 다운로드해 보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과거 <트윈픽스>나 <X파일> 같은 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지금처럼 양질의 드라마가 한꺼번에 들이닥친 예는 없었다. 이번호 특집기사로 내세운 ‘미국 TV드라마 혁명’은 이런 현상의 면면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뉴욕의 양지현 통신원은 지금의 미국 드라마에 대해 ‘42분짜리 블록버스터’라는 표현을 썼다. 그만큼 많은 돈을 들여 많이 버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전세계 TV네트워크와 인터넷 통신망이 발달할수록 해외 수익구조도 좋아질 전망이다. 그렇다고 할리우드가 문을 닫진 않겠지만 일방적인 영화의 비교우위를 주장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은 확실하다.
이것이 미국에만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 한국에서 영화는 여전히 관객 수가 늘고 있지만 한계에 다다를 시점이 머지않은 걸로 보인다. 극장을 찾는 횟수가 더 늘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TV, DVD, 인터넷 등 다른 매체를 통한 관람이 될 텐데 이 경우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HD화질의 영화나 드라마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화질만 놓고 영화의 경쟁력을 운운하긴 힘들어졌다. 여기에 한류라는 변수를 더하면 드라마 제작비가 치솟는 상황이 이해가 된다. 국내에서도 고비용, 고수익 구조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기다. 드라마가 ‘42분짜리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낼 때 한국영화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또는 국내에서 블록버스터급 드라마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영화와 방송의 인적 교류가 왕성해지는 현상은 이미 양쪽이 공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특집을 국내에서 벌어질 일을 예측해보는 기사로 받아들여도 좋다. 이런 환경에서 영화가 살아남을 길은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TV드라마가 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꼭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이게 TV드라마가 아니라 반드시 영화여야 하는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