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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씨에게 생긴 일, 웃음과 비애의 카오스
2001-02-16

영화사상 가장 급진적 코미디 선보인 자크 타티 감독

◈ 어느 작가가 자작(自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나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일차적으로 작품의 의도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작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느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라는 것이 완성된 작품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를테면 작가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것을 우리가 작품에서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때에도 작가의 의도를 최우선의 것으로 생각해 그것에 따라야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작품 해석의 권한을 여전히 작가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촌스러운’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 비평적인 해석간에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면 그 또한 심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작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어떤 부분이 작품에 스며들게 돼서 생기는데 이러한 ‘과잉의 부분’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우리의 흥미를 자극한다.

낡은 세계관, 혁명적 스타일

자크 타티는 자신이 얼마나 혁신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를 정작 자신은 깨닫지 못한 인물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전혀 몰랐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프티부르주아적인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방법론에 충실함으로 인해 전례없는 영화형식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처럼 낡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 그런 영화를 만들어낸 것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거의 기적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1967년 그가 ‘괴작’ <플레이타임>을 발표했을 때 자크 리베트는 “이 영화는 자크 타티에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타티는 1950년대 프랑스영화계에서 일종의 대안적 흐름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로베르 브레송과 자주 비견되곤 하지만 두 사람의 기질 및 배경의 차이를 감안하면 그의 위치는 더욱 특이한 것으로 비친다. 확실히 그에게는 브레송 같은 문학적 교양도 그렇다고 종교적인 엄격성도 없다. 따라서 영화가 굳이 개인적인 표현이어야 한다는 신념도 강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물론 그에게도 ‘장인적인 완고함’이라 할 만한 것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자크 타티’라는 인물에 귀속돼야 하는 그런 유의 것은 아니다).

자크 타티는 1907년 파리의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러시아 출신으로 할아버지대에 파리로 이주했다고 하며 그래서 그의 본명은 자크 타티셰프이다. 부친의 직업은 액자 제조가로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고 한다. 타티는 어렸을 때부터 스포츠에 열광했다고 하는데 특히 럭비와 테니스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관찰력이 뛰어났던 그는 여러 스포츠의 동작을 팬터마임으로 해보여 주위 사람들을 웃겼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직업적인 엔터테이너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30년대 초에 그는 뮤직홀에서 정식으로 공연을 하기 시작해 상당한 인기를 끌게 되는데 몇년 뒤에는 뮤직홀에서 번 돈으로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이때 만든 영화가 르네 클레망이 연출하고 타티가 주연을 맡은 <왼쪽을 주의하라>(1936)였다. 2차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했던 그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주위의 친구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축제의 날>(1949)이다. 아주 적은 예산에다가 몇명을 제외하면 영화 경험이 전무한 스탭들을 모아 만든 이 영화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어 타티로 하여금 영화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주었다.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한 이 영화에서 타티는 주인공인 우편배달부 프랑수아 역을 맡았다. 영화는 마을의 축제를 위해 만들어진 임시 영화관에서 미국의 발달된 우편배달 시스템에 관한 영화를 본 프랑수아가 자기 혼자 힘으로 미국식으로 편지를 배달하겠다고 나서지만 결국 죽도록(?) 고생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인들은 스피드와 규칙성을 모토로 해서 오지에는 심지어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우편을 배달하지만 교통수단이라곤 고작해야 자전거 한대밖에 없는 프랑수아로선 아무리 열심히 뛰어봐야 한계가 뻔한데다 오히려 사고만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타티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트가 되는 어설픈 몸동작을 이 영화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지만, 허술하긴 하지만 플롯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아직 본격적으로 타티가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기는 힘든 작품이었다. 하지만 2차대전 직후의 프랑스인들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망과 질시의 감정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시 흥미로운 작품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과묵한 윌로씨 태어나다

1953년 초에 개봉된 <윌로씨의 휴가>는 ‘타티적 우주’가 최초로 제시된 작품일 뿐 아니라 타티 자신이 만들어내 대중적인 캐릭터가 된 윌로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본격적으로 타티적인 세계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은 먼저 그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필요하지도 않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노르망디 해안의 어느 휴양지로 일단의 사람들이 휴가를 위해 몰려오고 영화의 끝에서 그들은 다시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굳이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이 휴가기간 동안 사람들은 타티, 즉 윌로씨 때문에 몇번의 해프닝을 겪게 되지만 하지만 그것도 훗날까지 기억할 만한 중요한 일은 물론 아니다. 영화는 그저 여름철 해변가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을 별다른 연관성 없이 그저 나열하듯이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물론 이 영화의 비범한 매력 중 하나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느슨함은 정확히 휴가객들의 정신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장하자면 별다른 생각없이 영화관에 간 관객의 심상이기도 할 것이다. 휴가의 초반에는 약간의 기대감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반복의 시간감각 즉 권태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휴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가의 시간은 노동의 시간처럼 기복이 심한 시간이 아니다. 바쟁이 이 영화가 개봉될 당시에 지적했듯이 타티가 그리는 휴가 중의 세계는 “스톱워치로 재는 것이 가능한 그런 부조리한 속도로 진행”하는 것이다.

‘타티적 우주’의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그것이 보여지는 어떤 것 즉 풍경(landscape)인 것 이상으로 들려지는 것 즉 음장(soundscape)이라는 점이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은 대사를 포함한 온갖 소리들이 놀랄 만한 명확성과 함께 전달된다. 기차역의 안내방송, 해변가의 바람소리, 놀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등등. 특히 타티의 놀라운 점은 인물의 대사에 결코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사운드 요소 중 하나로 다룬다는 점이다. 보통의 영화에서라면 대사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듣는 여러 소리 중 하나와 다름없이 다루어진다면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까운 것이 되고 이것은 확실히 놀라운 체험이라고 할 만하다. 과연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대개 진부하기 그지없는 것이고 더 흥미로운 것은 윌로씨 자신은 영화의 앞에서 호텔에 체크인할 때 “윌로”라고 짤막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부분을 제외하면 전혀 대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윌로씨를 좀더 잘 표현하는 청각적 기호는 오히려 그의 낡은 자동차가 내는 기괴한 마찰음이다. 휴가지에 윌로씨가 도착했음을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도 바로 이 자동차가 내는 소리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물리적 현존을 감지하는 데 청각적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 영화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현실은 이미지의 덩어리인 것 이상으로 소리의 덩어리인 것이다.

윌로를 넘어, 현실을 닮은 코미디를 꿈꾸다

1958년에 타티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나의 아저씨>는 그를 부동의 인기감독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윌로씨의 캐릭터를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도 그의 영화는 상당한 관객을 끌어들일 정도가 되어서 그는 국제적인 명성도 동시에 획득했다. 이 영화는 파리를 무대로 아직도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남아 있는 윌로씨가 사는 중하류층의 거주지역과 현대적인, 더 정확히는 기계화된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중상류층의 지역을 대비시키고 있다. 윌로씨는 누나가 사는 부자동네에 갔다가 기계들을 제대로 다룰 줄 몰라 한바탕 곤경을 치르게 된다. 날로 기계화되는 현대적인 삶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타티의 세계관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윌로씨가 몸담고 있는 옛날 방식의 삶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가득 차 있는 이 영화는 타티의 영화 중 가장 센티멘털하고 ‘따뜻한’ 작품으로 그런 만큼 상당한 대중적인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심지어 외국어영화상이지만 아카데미상까지 받았던 것이다!).

60년대 들어 타티는 그동안의 성공을 발판으로 야심적인 프로젝트에 착수하게 된다. 코미디는 코미디이되 가장 현실에 근접한 그런 코미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타티는 당시 윌로씨라는 캐릭터가 지나치게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다. 감독인 그보다 윌로씨가 훨씬 유명해짐에 따라 관객이 그의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윌로씨를 보기 위해 온다는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그에 따라 이 신작에서는 윌로씨의 캐릭터가 전의 두 작품에 비해 훨씬 비중이 약해지게 된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파리 시내의 한 구역을 그대로 재현한 세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의 전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제작비를 필요로 했다. 게다가 그는 이 영화를 70mm 시네마스코프에 스테레오로 녹음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은 사재를 쏟아붓고도 모자라 빚까지 지면서 겨우 제작비를 마련한 그는 1967년에 <플레이타임>을 완성하게 된다. 영화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참담한 흥행실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아마도 2차대전 이후 프랑스영화계의 최대의 흥행실패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여서 타티는 이때 진 빚으로 죽을 때까지 허덕였다고 한다. 흥행실패에는 타티 자신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개봉 당시 이 영화가 최적의 상황에서 상영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70mm 및 스테레오 사운드 설비가 된 극장에서만 개봉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플레이타임>은 왜 흥행에 실패하고 만 것일까. 우선은 윌로씨를 보고싶어하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윌로씨는 물론 이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특별히 다른 인물에 비해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냥 여러 인물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 대목은 어찌 보면 관객의 그간의 오해에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전작에서도 결코 윌로씨가 통상적인 의미에서는 주인공이라고 하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그가 주인공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흥행실패의 또다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타티가 관객의 능동성을 너무 과대하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플레이타임>은 무엇보다도 그 정보량의 과다로 보는 사람들을 질리게 하는 작품이다. 다양한 시각적 정보들이 70mm 와이드 스크린의 프레임을 꽉 채우고 있을 뿐 아니라 화면의 전경과 후경을 나누어 다른 사건이 진행되고 있음을 동시에 보여준다. 거기다가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최신식 아파트를 설계해 일종의 멀티스크린 효과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관객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윌로씨가 이번에는 어떤 ‘사고’를 쳐서 우리를 웃겨줄 것인가를 기대하던 관객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웃으라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어찌 보면 <플레이타임>은 바쟁류의 ‘의미의 민주주의’의 전범이 될 만한 영화이다. 화면에 비쳐지는 것들간에 일종의 서열구조를 만들고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관객이 지배적인 의미를 추출해내도록 하는 것이 통상적인 영화 의미의 생성과정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어떠한 의미에도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히 혁신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대다수의 일반 관객에게는 의미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직은 ‘의미의 카오스’로밖에 비치지 않는 것을. 관객은 자신들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을 끌어안고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플레이 타임>, 너무 일찍 온 미래

60년대 영화 중 <플레이타임>과 비견할 만한 작품으로는 스탠리 큐브릭의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과감하게 도입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미래적 상상력을 충실하게 투영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확실히 두 작품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는 있으되 <플레이타임>에는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당대의 관객이 호흡하고 있는 시대적 공기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큐브릭이 의도했든 아니든간에 에는 확실히 당대의 카운터컬처의 초월론적인 부분과 조응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이 영화의 컬트적인 인기를 가능케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플레이타임>이 보여주는 푸른 색조가 감도는 미래형의 고층건물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미학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는 너무 난데없는 것처럼 비쳤던 것이다. 마치 외계에서 날아온 이름모를 유성처럼.

영화사적으로 보아 타티가 맥 세네트에서 시작되어 버스터 키튼, 해리 랭든 등으로 이어지는 벌레스크적인 코미디의 전통에 속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유의 코미디에서 자주 목도하게 되는 몸동작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은 타티에게도 그대로 발견된다. 하지만 타티는 이런 전통을 자기 식으로 수정해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타티가 이들 선배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은 그에게 ‘판타지적인 부분’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정적인 대목에는 주저없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던 이들과는 달리 타티는 ‘있을 것 같지 않은’ 부분은 철저히 배제한다. 어느 비평가는 그리하여 타티가 이들에 비해 “훨씬 상상력이 없는 작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력의 결여는 역으로 말하면 타티의 세계가 현실에 대한 엄밀한 관찰하에 구성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일 게다. 그의 코미디의 핵심은 말하자면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을 그 논리적 극단까지 몰고 간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타티의 세계는 자세히 관찰했을 때 우스꽝스럽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새삼 일깨워준다. 고다르가 말한 대로 그는 “문제가 전혀 없는 곳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성공적인 코미디’가 관객에게 주어야 할 안전한 거리감까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즉 영화 속의 상황에서 어느 정도 관객이 격리돼야 하는 데도 실제로 관객 자신도 코미디의 한 부분이라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것은 결코 보통의 관객에게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윌로씨처럼 사실은 부적응자일 수 있다’는 깨달음은 결코 즐거운 체험은 아닐 것이다.

거기다가 타티가 자신은 ‘재미있는 영화를 만든다’고 호언하면서 장인적인 자부심을 겉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제 행동에서는 예술가의 그것에 가까운 행태를 보여주었다는 것도 그에 대한 몰이해를 더욱 부채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영화에 시네필들이 열광하는 것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화가 어떤 상황에서 상영되는가에 대해 극히 까다롭게 굴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역설은 그가 낡은 프랑스적인 것에 집착하는 그런 기질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마치 인디펜던트 감독처럼 작업을 해야만 했던 그런 상황의 결과로 빚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역설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영화사상 가장 급진적인 코미디를 만들도록 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울한 말년, 윌로보다 먼저 가다

<플레이타임>으로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던 타티는 그 이후 <트래픽>(1971), <퍼레이드>(1974) 등 두편의 영화를 더 만들게 된다. 윌로씨를 다시 중요한 인물로 배치하는 등 예전의 인기를 되찾기 위해 나름대로 ‘타협한’ 구석들이 보이는 이 영화들은 하지만 예전의 성공을 반복하지는 못한다. 그는 말년에 텔레비전 스튜디오를 무대로 한 <컨퓨전>이란 작품을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제작비를 모으는 데 실패해 촬영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컨퓨전>에서 그는 윌로씨를 등장시킨 다음 바로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캐릭터에 대해 갖고 있던 묘한 애증관계를 완전히 청산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죽이기 전에 그 자신이 먼저 죽고 만다. 그는 1982년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1970년대 초반 파리에 머물던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타티와 인터뷰한 것을 계기로 그의 조수가 되어 잠시 동안이나마 <컨퓨전>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경험을 감동적으로 술회하고 있다. 매일 그의 사무실에 가서 그가 말하는 영화의 아이디어를 듣고 함께 토론하면서 정리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드디어 이 영화에서 윌로씨를 죽일 결심을 한 타티는 그 상황을 그에게 설명한다.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도중에 방청객으로 가 있던 윌로씨가 방송사에 잠입한 테러리스트가 쏜 총탄에 잘못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생방송 도중이므로 이 사고는 시청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처리돼야만 한다는 것이다. 카메라 위치를 이리저리 따져본 타티는 결국에는 고개를 젓는다. “역시 돈이 너무 많이 들겠는데.” 그리고는 로젠봄에게 “오늘은 그만 됐네. 돌아가게”라고 말했다. 창 밖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로젠봄의 표현에 의하면 타티는 ‘슬라브적인 멜랑콜리’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우울에 빠진 타티에게 더이상 말을 거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임재철/ 영화평론가·<필름컬처> 편집주간marienba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