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들의 별값은 떨어졌나. <국경의 남쪽> 32만명, <그해 여름> 전국 관객 32만명, <사랑따윈 필요없어> 52만명,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73만명…. ‘코미디의 제왕’ 차승원과 ‘뵨사마’ 이병헌, ‘흥행보증수표’ 문근영, ‘환상의 커플’ 정지훈, 임수정 등 특급 스타들이 출연한 영화들의 성적표를 보고 있노라면 찬란했던 이들의 별빛이 흥행이란 차원에선 흐려지고 있다는 진단을 피하기 어렵다. 게다가 끈기있게 관객을 모으며 1천만 관객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왕의 남자>, 저예산 HD영화로선 이례적으로 229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인 <달콤, 살벌한 연인>, 캐스팅 후순위 김아중을 내세워 400만 관객을 돌파한 <미녀는 괴로워> 등 특급 스타가 출연하지 않은 영화들이 흥행전선에서 분전을 펼쳤다는 사실은 ‘스타=흥행 보장’이라는 충무로의 오랜 상식을 타파한다.
얼굴마담 보고 묻지마 투자는 옛말
스타 배우들의 영향력, 그러니까 ‘스타 파워’가 줄어들었다고 판단하게 하는 근거는 흥행 성적만이 아니다. 영화 제작에 필수적인 과정인 투자에서도 스타 파워는 과거에 비해 크게 위축됐다. 충무로 관계자들은 2006년을 기점으로 ‘인기있는 배우만 붙잡으면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옛날 이야기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한 투자사 관계자는 “투자의 위험을 최대한 줄인다는 입장에서 스타는 여전히 중요한 변수”라고 못박으면서도 “스타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투자하겠다는 식의 접근은 대부분 사라졌다”고 충무로의 분위기를 설명한다.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는 영화가 쏟아지는 현 상황에서 투자사 또한 스타 캐스팅만을 믿고 투자를 진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변화는 2005년 6월과 비교하면 놀라운 것이다. 당시 강우석 감독으로 대표된 제작사쪽과 최민식, 송강호가 앞장선 매니지먼트사 사이에서 갈등이 불거진 건 급상승한 스타 파워에서 기인했다. 상당수 매니지먼트사들은 스타 캐스팅이 돼야 투자가 가능한 상황을 이용해 제작사에 공동제작 크레딧이나 무리한 지분을 요구했다. 물론 투자를 받기 위해 일부 제작사가 매니지먼트사에 먼저 지분을 떼어주거나 공동제작을 제안하기도 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급격하게 강해진 스타 파워가 다소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재의 ‘스타 파워 저하’를 어떤 면에선 이런 현상이 정상화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강우석 감독이 “아직도 스타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나. 지금은 누가 캐스팅이 됐다고 해서 투자가 되는 게 아니”라며 한때 갈등 관계였던 매니지먼트사들과 협력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도 결국 눈 튀어나올 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오빠’ 나와도 재미없으면 안 봐요
그렇다면 ‘스타 권력’이라는 말까지 탄생시킨 스타들의 입지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걸까. 우선 스타의 존재가 흥행에 끼치는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충무로 관계자들은 최근 관객의 취향이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를 선택하는 데 있어 스타의 존재보다 전반적인 완성도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CJ엔터테인먼트 이상용 투자팀장은 “과거에는 스타 캐스팅이 되면 투자 유치가 쉬웠으나 요즘은 무차별적으로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스타 파워는 해당 배역에 잘 들어맞는 배우를 캐스팅했을 때 선택적으로 작용한다”고 밝힌다. 다시 말해 관심있는 스타가 출연하더라도 작품 평이 좋지 않거나 캐스팅 효과를 극대화하지 못했다면 극장을 찾는 발길이 줄어든다는 분석이다. 개봉 전 이미 영화 내용이나 질적 성취도에 대한 정보를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영화 선택에서 스타 의존도를 낮추는 요인이다. CJ 이승철 마케팅 팀장은 “얼리어답터들은 인터넷 등을 통해 자기 의사를 명확하게 밝힌다”며 “나쁜 소문이 흘러나오면 스타 파워가 미처 발휘되기 전에 해당 영화가 극장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대답한다. 투자기법이 좀더 선진화됐다는 점도 스타 파워의 약화에 한몫한 듯 보인다. 한 제작사 대표는 “과거 투자자들은 ‘캐스팅을 보고 가자’는 식이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판단하는 능력이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스타 캐스팅을 투자에 대한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충무로에 잔뼈가 굵은 ‘선수’들만 남고 투자마저 소극적인 현재 시점에서는 시나리오, 감독, 제작사 등 복합적인 조건을 동시에 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스타는 여전히 중요하다
스타 파워가 약해졌다고 스타의 중요성이 없어졌다거나 캐스팅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물론 아니다. “스타 캐스팅은 언론과 관객의 관심을 끌기 쉽기 때문에 홍보에 용이하다”는 이승철 팀장이나 “시나리오만 가지고 결정하는 투자사는 없다. 투자는 캐스팅 다음에 이뤄진다”는 한 제작 관계자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무엇보다 관객은 여전히 스크린 안에서 스타를 보고 싶어한다. 다만 영화의 다른 요소들을 압도한 채 홀로 승승장구하는 형태의 스타 파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다. 불안요소는 여전히 존재한다. 최근 스타 파워의 하락이 2006년의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주장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영화가 108편이나 쏟아진 지난해의 경우 영화 홍수 속에서 스타들의 변별력을 판가름하기 어려웠고 그 여파로 투자 또한 지극히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기획 자체가 저예산인데 시나리오가 좋다면 개런티를 굳이 일반적인 사이즈로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매니저들을 만나며 고무적이라 느꼈다”는 싸이더스FNH 윤상오 이사의 말처럼 스타 시스템 자체가 어느 정도 변화하고 있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그것이 한국영화계를 감돌고 있는 위기감에서 비롯됐을지라도 ‘스타·매니지먼트와 투자·제작쪽이 상생해야 영화도, 흥행도, 인기도 있다’는 교훈만 얻는다면 스타들의 별빛 또한 ‘진정한 찬란함’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