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에서 2006년에 좋았던 영화들을 선정하는 설문을 했다. 한해 동안 본 영화들 중에서 최고였다고 생각하는 영화들을 가리기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아서, 벼락공부하듯 놓친 영화들을 보기도 하고 확신이 안 서는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설문 항목 중 특이한 걸 발견했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영화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길티 플레저’ 목록이라면 자신있게 채울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영화기자를 하다 보면 일로 아는 사람들이나 지인들한테서 “어떤 영화가 좋아요?” “어떤 배우가 연기를 잘했어요?”라는 질문을 일상다반사로 받는데, 이때는 그야말로 모범답안을 내놓게 된다는 뜻이다. 재미있게 본 영화와 잘 만든 영화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좋아하지만 모범답안에서 탈락한 영화들이 있고, 그런 영화들은 문제의 ‘길티 플레저’, 즉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좀 쑥쓰럽지만’ 목록에 오른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초콜릿을 먹으면 살이 찐다는 사실을 알아도, 커피를 많이 마시면 불면증이 악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다 말려도, 혼자 숨겨놓고 즐기는 것들.
남자친구랑 영화를 볼 때는 <괴물>이나 <라디오 스타>를 선택하지만, 집에서 혼자 우울하게 보낼 때는 <쥬랜더>나 <덤 앤 더머>를 반복 시청한다. 마치 십자수 놓는 걸 좋아하는 씨름선수가 된 듯한 기분으로, 몰래몰래 본다. <레이크 하우스>에 삽입된 폴 매카트니의 노래 <This Never Happened Before> 때문에, 큰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이크 하우스>를 세번이나 봤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 영화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10번 넘게 봤다는 사실을 내놓고 말하기에는 너무 화장실스러운 인간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잔머리를 굴리게 되는, 하지만 정말정말정말 좋아하는 취향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 ‘길티 플레저’의 최고봉은 내 친구들이다. 서른 넘도록 결혼도 안 했지, 남들 판교에 집 살 때 카드값에 허덕이지, 월급 탈탈 털어 여행 안 가면 죽겠다 아우성이지, 영재교육 붐이라는데 아예 애는 낳지도 않지…. 흔히 말하는 ‘모범’과는 거리가 멀지만, 만났다 하면 새벽까지 술을 마시지만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내 친구들. 삽질이 일상인 나도 내 친구들도, 남들 보기엔 실소를 머금게 되는 슬랩스틱영화 같은 인생을 살지만 어떤 영화보다 생동감있다. 그리고 잭 블랙의 엉덩이는 세계 최고로 섹시하다. 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