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영화읽기] 모든 제임스 본드의 기원을 찾다

20편을 돌아서 온 시리즈의 첫편 <007 카지노 로얄>이 기존 007와 다른 점

지나치기 쉽지만, <007 카지노 로얄>의 오프닝 시퀀스는 지금까지 007 시리즈의 전통에서, 두 가지 측면에서 벗어나 있다. 일반적인 007 시리즈 영화에서는 MGM 로고가 사라지고 나면 총신 구멍 속으로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여 정면을 향해 총질을 시작하고, 그의 살인 면허 더블 오(00, 속칭 ‘공공’이라고도 한다)를 암시라도 하듯 화면이 서서히 피로 붉게 물든다. 그리고 본드의 활약상을 짧게나마 볼 수 있는 오프닝 액션신이 이어지는데, 그것이 끝남과 동시에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007 시리즈의 또 하나의 전통인 실루엣의 여성 나신이 등장한다. 이러한 일련의 연쇄가 007 시리즈 일반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007 카지노 로얄>은 MGM 로고 이후 바로 오프닝 액션신이 펼쳐진다. 달리 말해, 총신 구멍 사이로 멋들어지게 총을 쏴대는 우리의 ‘본드, 제임스 본드’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이 총신 구멍 장면은 완전히 삭제된 것이 아니라 오프닝 액션 이후로 밀려나 있다. 기존의 시리즈와 이 오프닝 시퀀스의 차이점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큰 놀라움은 오프닝 크레딧에서 요염한 매력을 뽐내곤 했던 본드걸의 실루엣 나신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순서의 뒤틀림과 여성의 실루엣 나신의 누락은 어떠한 맥락에서 발생한 것일까? 어쩌면 이 두 가지 일탈이야말로, 새로운 제임스 본드이자 007의 탄생 순간을 담으려는 <007 카지노 로얄>이 지니는 독자성의 징표는 아닐까?

오프닝 시퀀스·엔딩 장면, 다른 시리즈와 연결되는 문

여섯 번째 제임스 본드인 대니얼 크레이그를 내세운 007 시리즈의 스물한 번째 영화인 <007 카지노 로얄>은 1953년 출간된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존 휴스턴 등의 세 감독이 공동 연출한 <카지노 로얄>(1963)이 이미 발표된 적이 있긴 하지만, 007 시리즈와는 궁극적으로 무관한 작품이고 보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 되어야 했던 <007 카지노 로얄>이 스물한 번째 작품이 되어 도착한 셈이다. 이러한 면에서 새롭게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대니얼 크레이그는 가장 뒤늦게 태어났지만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본드들의 기원을 보여주는 가장 앞선 자리를 차지하는 행운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첫 번째가 스물한 번째로 연착해 도착했다는 사실은 영화의 오랜 전통인 오프닝 시퀀스가 전체적으로 뒤틀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는 살인 면허를 얻기 위한 마지막 관문 앞에 서 있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6년간 테스트를 받았지만 살인 기록이 없던 본드(이는 요원으로서 치명적 결함일 것이다)는 생에 첫 살인 임무를 성공함으로써 ‘007 제임스 본드’로 탄생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총신 구멍 장면과 화면을 타고 흐르는 피. 007의 오랜 전통인 이 장면은 살인 면허를 소지한 ‘007 제임스 본드’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었다. 누구나 살인 면허를 받을 수 있다면 본드는 살인 면허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나 뭐라나. 어쨌거나, 영화는 오프닝 액션신이 끝난 직후 이 전통적인 장면과 오프닝 크레딧을 연결하여 보여주는데, 그 속에 007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 즉 제임스 본드가 살인 면허 요원으로서 007이라는 번호를 부여받는 장면을 삽입한다(컴퓨터 화면에 “James Bond-007 status confirmed”라고 작성된다). 007 시리즈에서 총신 구멍 속에서 총을 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살인 면허를 소지한 ‘007 제임스 본드’만이 할 수 있는 권한이지, 감히 ‘견습생 제임스 본드’가 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본드가 어디까지나 007이라는 살인 면허를 부여받기 이전의 견습생에 불과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순서의 도치는 필연적이다. 만약 <007 카지노 로얄>이 이전의 순서 그대로 오프닝 시퀀스를 구성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선재했던 선배 007들의 위상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것이니까 말이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순서의 도치를 통해 지금까지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감히 정면(관객)을 향해 총질을 해댈 수 있는 그 건방진(?) 자격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007 카지노 로얄>은 오프닝 액션신에서 두 장면을 교차함으로써 본드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하나는 전통적인 본드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대니얼 크레이그로부터 시작될 새로운 본드의 캐릭터이다. 체코에서 이중 첩자를 죽이는 장면이 전통적인 본드의 냉정하면서도 여유있는 저격수로서의 모습이라면, 그와 교차된 화장실 장면에서 이중 첩자의 연락책을 제거하는 본드의 모습은 테크놀로지의 과시보다는 크레이그의 단단한 몸을 앞세우는 새로운 시리즈의 탄생을 예고한다(실제로 영화 전편에서 강조하는 새로운 본드의 모습은 야마카시에 어울릴 만한 날렵한 몸을 앞세운다. <터미네이터2>의 T-1000을 연상시킬 만큼). 하지만 새로운 제임스 본드의 탄생이 한편으로는 최초의 007 제임스 본드의 탄생이기도 하다는 점은 <007 카지노 로얄>이 지닌 가장 큰 어려움이다. 즉, 관객에게 친숙한 본드의 보편적 특징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새로운 본드를 창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초보 면허’다운 본드의 서툰 솜씨도 함께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이러한 면에서 <007 카지노 로얄>은 시리즈의 첫 작품이 되지 못한 이상, 새로운 배우의 등장과 함께 영화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007 카지노 로얄>의 전편에서 본드의 지나친 성급함이나 미성숙함, 감성에 허덕이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인데, 영화의 목적은 완성된 본드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본드가 되었는지에 대한 빈틈을 채우는 것, 즉 (어느 공간의 미장센이 보여주듯) 하계의 여행 이후 완성된 자로 거듭나는 본드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실제로 그는 죽었다 살아난다). 이러한 면에서 영화의 마지막 대사, 전통적으로 본드가 스스로를 소개할 때 사용하는 반복적 표현인 ‘본드,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꽤 매력적이다. 영화의 끝에서야 ‘007 제임스 본드’로의 완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듯한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대사는 스물한 번째로 도착했지만 실제로는 첫 번째 영화인 <007 카지노 로얄>의 엔딩을 장식할 만한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007 카지노 로얄>의 엔딩은 한 작품의 문을 닫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발표된 모든 제임스 본드를 향해 열려 있는 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베스퍼, 본드와 본드걸의 접착 불가능한 관계의 기원

이언 플레밍이 창조한 본드는 냉전으로 얼룩진 1950년대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007 카지노 로얄>이 그의 탄생 과정을 담는다 하더라도, 그 냉전의 시대를 직접적으로 끄집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본드는 언제나 현재의 본드이니까. <007 카지노 로얄>은 오프닝 액션신에서 본드가 탄생했던 시절의 필름 누아르의 시각적 양식을 통해서 1950년대를 은연중에 상기시키고자 한다. 체코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하는 오프닝 액션신은 필름 누아르의 시각적 스타일로 냉전 시대의 무거운 분위기를 극 속에서 흡입함으로써 시간의 자취가 흐릿해지는 효과를 낳는다. 하지만 이는 단지 냉전이 낳은 산물로서의 본드를 암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냉전 종식 이후 소재 고갈에 허덕이고 있는 007 시리즈가 풍요로운 소재로 가득했던 냉전 시대에 느끼는 아련한 향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M은 냉전 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한다).

<007 카지노 로얄>은 본드의 탄생을 담은 이언 플레밍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으면서도, 시간의 간극에 의해 그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스토리로 나아가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다소 밋밋하게 이어지던 <스타워즈> 시리즈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멜로드라마로 장외 홈런 한방을 크게 날린 것처럼, <007 카지노 로얄> 역시 본드와 베스퍼(에바 그린)의 로맨스로 승부수를 던진다. 이 작품이 그다지 매끄럽게 구성되어 있진 않다 하더라도, 최근의 007 시리즈에 비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순정적으로 한 여인을 사랑하는 본드의 모습이 등장한다는 것, 달리 말해 ‘연애는 만끽하되 사랑은 하지 않는’ 여성 편력의 원인이 되는 외상적 사건이 등장한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007 시리즈에서 그 누구도 믿지 않는(믿을 수 없는) 본드는 근본적으로 자기 폐쇄적 인물이다. 이러한 자기 폐쇄적 본드의 캐릭터는 무엇보다 예외를 두지 않는 그의 철칙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 계기가 되는 인물이 바로 베스퍼이다. <007 카지노 로얄>이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황을 조장하는 이중 첩자를 소재로 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면에서 효과적이다. 본드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그럼으로써 유일한 예외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베스퍼의 배신은 본드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숨을 쉬기 위한 숨구멍인 ‘예외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게 함으로써 완전한 007 제임스 본드, 즉 자기 폐쇄적 제임스 본드를 완성시킨다. 결국 베스퍼는 기존의 본드걸과는 다른 예외적 위치 속에서 본드걸들의 가능 조건과,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본드걸이 그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져야만 했던, 또는 그에게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튕겨 나와야 했던 이유를 제공한다. 베스퍼는 여성들이 그 실루엣(몸의 흔적)으로만 본드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본드와 본드걸의 접착 불가능한 관계의 외상적 원인인 것이다. 오프닝 크레딧에서 누락되었던 실루엣 여성 나신은 이러한 베스퍼의 예외적 위치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변주된 장면들은 이제 어떻게 귀환할까. 이제는 질릴 때도 됐건만 007의 새로운 영화에 자꾸만 손이 가는 이유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