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가부장제의 응달을 헤집으며 주류사회의 아킬레스건을 툭툭 건드리는데도, 임상수라는 감독은 비평가들에게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때는 페미니즘이라는 방패막 뒤에서 처녀들의 알몸장사를 했다는 상업주의에 관한 화살이 심심치 않았고, 이번에는 청소년들의 일탈적인 삶에 대한 관음증이니 상투적인 십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시비가 불거져 나온다. 비평은 그렇다 치고 대한민국 관객도 임상수라는 감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선지, <반칙왕>으로 주가가 치솟은 제작사 봄에 흥행실패라는 눈물을 안겨주었다.
하긴 <나쁜 영화>에서부터 뭔가 주류사회나 한국영화의 미학적 잣대에 시비를 거는 의욕적인 몇몇 영화들이 태생적으로 센세이셔널리즘에 관한 한 의심을 받아오기는 했지만, 단돈 몇억 가지고 만든 디지털영화마저 이 지경이니 대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싸가지 없는 영화가 가능하기는 한가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비판을 하려거든 아예 알고 보니 옆집 누나가 뱀파이어였는데 커밍아웃한다는 아주 황당한 김지운식 유머로 가버리던지 말이다.
호러니 멜로니 장르영화들만 우후죽순으로 나와 서로 제살 물어뜯기든 시너지 효과든 누가누가 관객을 많이 울리나 한바탕 겨울 공연을 끝내고 피안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지금. <버티칼 리미트> 같은 영화에 관객이 100만명씩 들고, <약속>이나 <편지>와 별 다를 바 없는 <하루>에 줄줄이 눈물을 쏟는, 아무래도 2001년 벽두 대한민국 영화판은 호러영화 5편이 좌르르륵 귀신놀이를 벌였으면서도 어느 하나 건질 것 없었던 지난 여름처럼 소모전의 양상 내지는 정신분열의 기미마저 보인다.
'눈물', 그 비극에의 동참 혹은 냉담
센세이셔널리즘이든 상업주의든 계몽주의든 눈물에 관한 비평가들의 리뷰를 눈여겨보면 <눈물>과 같은 영화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데는 딱 한 가지 봉우리인 역치점이 중요한 것 같다. 그걸 넘으면 눈물은 눈물이요, 그걸 넘지 않는 자에게는 눈물은 신파인, 눈물지수의 임계점 같은 ‘진정성’의 문제. 이 역치를 넘어선 영화평론가 김시무는 리뷰에서 영화의 제목이 주는 ‘눈물’의 의미만이라도 포착할 수 있다면 벼랑 끝에 몰린 비극적 주인공들의 삶에 동참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상찬한다. 반면 에 리뷰한 영화평론가 김영진, 이상용과 이효인은 이구동성으로 <눈물>은 매우 상투적이고 드라마틱한 이야기 전개방식을 선택하고 있으며 계몽주의와 냉소주의, 공감과 관음증의 경계에 걸쳐 있는 석연치 않은 드라마임을 지적하고 있다. 분명 <눈물>의 이야기구조는 지극히 상투적일지도 모른다. 방황하는 거리의 아이들, 때리는 부모들, 착취하는 어른들, 심지어 유리조각이 켜켜이 박힌 손을 치유하는 임상수 본인의 ‘상처는 아물지만 자국은 남는다’는 대사까지도 상투적일 수 있다.
만약 <눈물>이 시네마베리테의 리얼리즘을 표방한다고 만방에 떠벌린다면, 그것은 가장 쉽게 자기 모순의 종착점을 향해 달리는 자살 열차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영화의 마지막 그래도 제일 심성이 고운 듯 보이는 한이가 약에 비틀거리는 새리를 데리고 온갖 악의 소굴 같은 용호의 술집을 나와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장면은 마치 <사관과 신사>의 마지막 장면 같지 않은가? 한과 새리, 용호의 삼각관계는 멜로 중에서도 유치짬뽕 멜로이며, 내면의 외로움 때문에 반드시 기둥서방을 달아야 하는 란과 이런 란을 착취하는 듯 보이는 창 역시 전형적인 588 술집 아가씨들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영화 <매춘> 속의 인간관계와 다를 바 없다. 또한 애인 란이가 자신의 아이를 유산한 뒤, 음식점에서 매맞는 아이를 보고 음식점을 뒤집어엎는 창의 행동 역시, 현실 속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질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몸, 토하고 얻어맞고 욕하고
그런데 임상수 영화에서 몸은 몸이 아니다. 그건 사회가 보여주는 온갖 모순의 장소요, 일상이 숨쉬는 쉼터요, 사회에 대한 욕구불만과 비판이 활화산처럼 솟아오르는 바디 페인팅의 장소이기도 하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성의 정치학과 결혼과 자신의 순결의식과 온갖 사회적 모순과 욕망이 부대끼고 체화하던 곳은 바로 여자들의 몸이었다. 그렇게도 빈번히 강수연과 진희경과 조재현의 나신을 까발기며 임상수가 말했던 그 수많은 알몸의 사회학들을 기억하시는지. <눈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분명 <눈물>의 아이들은 이 주류사회를, 자신에 대한 애정을 거둬간 집을 너무너무 싫어한다. 얼마나 싫은가 하면 아이들은 툭 하면 토하는데, 그것도 꼭 어른들과 맞장 한판을 뜬 뒤에 일어나는 일이다. 예를 들면 새리는 보호 관찰관에게 호되게 질책을 당한 분풀이로 여관에서 본드를 분 뒤 토악질을 한다. 날라리 창이는 친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며 그렇게 계부와 살기 싫으면 집을 나오라고 소리를 친 뒤 욱 하고 토한다. 그는 후에 무전취식 뒤 도주하다가 또 먹은 것을 모두 게운다. 아이들의 몸은 그대로 이 사회의 상처의 집적지이고 아이들은 몸으로 말하고 몸으로 세상을 때워나가는 것이다.
게다가 한이, 창이, 란이, 새리 이 네 주인공은 영화 줄곧 얻어터지고 맞고 부서지는데, 란이는 새리를 구해주려다 용호가 휘두른 주먹에 머리가 터지고, 새리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용호의 자해적인 제스처에 맞서서 손으로 컵을 깨다 그만 손바닥 모두에 유리가 박힌다. 창이는 강간치상죄를 뒤집어쓰고 도주하다 가스총을 맞고 콘크리트벽에 스스로 머리를 찢는다. 입 안 가득 피를 물고 창은 ‘아 좆 같아’라고 중얼거린다. 아이들이 상처를 입고 토하고 욕을 하는데 그러다보면 임상수의 영화에서 몸은 말 그대로 성과 폭력과 가족과 사회의 화마가 체화된 장으로 변화한다. 거기서 발악을 하듯 현실에서 도망가고자 하는데 해답은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이들의 상처가 사회탓 가족탓이라는 것 역시 도식이라는 데는 할말이 없다. 당신이 아파하고 상처입었던 때를 기억해보라. 애증이 없다면 상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상처
이런 상처에 침몰하기보다, <눈물>은 아주 건조한 듯 세부나 내면을 그냥 스쳐지나가고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그건 사실 이 사회의 냉소라기보다 어찌보면 되게 아픈데 안 아픈 척하는 일종의 오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사는 게 영화에서 보면 가장 날라리면서 문제 많아 보이는 창의 방식이다. 그리고 영화 기법상으로 보자면 유난히 잦은 핸드헬드 기법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진희경과 강수연의 아슬아슬한 정사 장면은 모두 핸드헬드로 처리되었다. 누가 뭐라 하든 그게 임상수 감독에게는 사회적 억압의 기제를 폭로하고 삶에 밀착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도 싶다. 그리고 이 점에서 개인적으로 아주 좋았던 것 중 하나는 한과 새리가 여관방에서 본드를 불던 장면의 카메라였다.
아이들은 밀폐된 여관방에서도 다시 밀폐된 빈 옷장 속에서 본드를 분다. 여자애는 늘 불었던 것이고 남자애는 그런 여자애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하는 것을 같이 해보는 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카메라가 다가와 열린 옷장 문 틈을 들여다 보자, 약에 취한 여자애는 남자애에게 옷장 문을 닫으라고 한다. 그러자 물러서는 카메라. 비틀비틀 흠칠흠칠 뒷걸음치는 카메라의 게슴치레한 발길은 그냥 아이들을 놔두고 싶어하는 게 분명했다.
<눈물>은 그런 영화이다. 나쁜, 좋은 따위의 편가름이나 아이들의 행동에 일탈이란 말을 붙이기가 미안해지는, 그냥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이다. 어떤 사람들은 감독의 자의식이 오버한다고 보았을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자의식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비판이나 문제가 아니라 상처였다.
<눈물>의 가리봉동은 벌집 같은 방 안에 아이들을 몰아넣고 사육하는 착취와 정체의 공간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이 아니고, 어른들이 하는 모든 일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노동과 맞바꾸는 생계와 생계를 희생하고라도 얻고 싶은 친밀감과 빨리 현실을 잊고 싶은 나쁜 잠과 세상과 완전히 결별하고 싶어 빈 방의 공허 속에서도 또 빈 옷장에 기어들어가 또 빈 머릿속에 환각의 방을 짓는 외로움들 말이다. 아이들은 분명 잃어버린 것이 있다. 그걸 임상수는 하늘을 낮게 나는 비행기와 벌거벗은 아이의 빈 몸뚱이로 연결지으며 단번에 폭로해버린다. 그걸 전화박스나 터널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앙각의 로 앵글 샷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되면 화면에 아이들이 차지하는 하늘은 점점 더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현실과 사회라는 틀과 무게에 의해 억압받고, 그게 바로 관조와 절제의 미학을 포기하고서라도 임상수가 얻고자 하는 우리가 사는 ‘동정없는 세상’의 진정성인 것만 같다.
제발 그 아이들을 내버려두라
한과 새리, 창과 란, 아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간 곳은 개펄이다. 콘트리트로 된 고가 밑을 마치 거대한 고래의 뱃속을 뚫고 내지르듯 질주하던 오토바이는 결국 철망쳐진 개펄에서 더는 나갈 수가 없다. 바다랍시고 간 그 공간에 쓰레기가 뜨고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인형이 진흙 한가운데 묻혀 있다. 그 길가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나란히 지나간다. 아이들은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이들을 흘끗흘끗 쳐다보며, ‘쟤네들 양아치인가봐.’라며 속삭인다. 입은 복색이나 말투, 시선의 교환들로 그 두 집단간의 경계는 뚜렷이 구별된다. 그러나 이 두 집단의 아이들은 싸우지 않는다. 그저 편견에 찌든 시선을 서로 교환하고 스쳐 지나갈 뿐이다. 아이들이 정작 싸우는 것은 새리를 탐내는 건달 용호나 돈을 제때 주지 않는 양품점 아줌마이다.
그러니까 <눈물>이 말해주는 것은 딱 한 가지이다. 이 사회는 불모이다. 이 사회에는 완충지대가 없다. 이 사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사회는 좆같다. 그리고 <눈물>을 보면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게 진짜라는 걸 알게 된다. <나쁜 영화>에서 장선우가 부박한 삶을 사는 길거리의 노숙자들을 정면 클로즈업 상태의 롱테이크로 잡았을 때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을 말이다.
그걸 탈출하려는 몸짓, 어쩔 수 없이 돌아오는 귀환점이 씻김굿 같은 섹스이다. 임상수의 영화에서 이야기의 정점에는 항상 모든 것을 떠나보내는 섹스가 놓여져 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마지막은 비로소 자신을 알아가기 시작한 진희경의 조재현을 압도하는 듯한 정사가 놓여져 있고, 역시 <눈물>에서 한과 새리는 바닷가에서 비로소 의사소통을 하듯 섹스를 한다. 물속에 숨겨진 카메라는 이 둘을 보는 듯 마는 듯 오르락내리락거리며 잡다가 사라진다.
상처란 애정이란 치유란 그런 것이다. 오르락내리락 보는 듯 마는 듯 태도가 애매모호해도 관심이 있으면 언젠가는 들키는 진심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피사체에 대해 애정이면 애정이고 그게 진정성이라면 진정성이다. 왜냐하면 애정은 집중도이고 자신의 피사체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에.
<눈물>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원하는 물기도 그저 한 방울이면 된다. <눈물>에 대해 불쾌감도 통쾌감도 가질 수 있고 비판도 칭찬도 할 수 있으되, 머리를 굴리며 건조하게 구는 것만은 죄악 아닌가? 그러니 십대 오리엔탈리즘이니, 일탈행동에 대한 관음증이니 구경거리니 이 영화에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려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 “그렇게 꼰대와 먹물 생색내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면 임상수를 아이들을 제발 좀 내버려두라.”
심영섭/ 영화평론가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