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만)의 일을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필자가 영화평이라는 걸 쓰기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영화는 ‘뭔가 볼 만한 것’의 대열에 거의 끼지 못했었다. 대신 그 대열에 끼기 위한 노력이 막 시작되고 있었더랬는데, 그때 등장한 영화들이 바로, 아아 생각이나 나시는가, <퇴마록>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쉬리> 그리고 <용가리> 등등의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2007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2006년 말. 거의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뭔가 볼 만한 것’은 놀랍게도 미국산 대작영화들이 아닌 한국영화들이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이번주 영업실적 1위를 먹은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되면 ‘뭐 그런 영화가 있기는 했어?’라는 반응이나 간신히 먹은 뒤 분루를 뿌리며 미국 땅으로 돌아가는 현상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왠지 공허함과 불안함을 느낀다. 한국영화의 양적 우세가 정말로 한국영화의 궁극적인 목표였는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불과 5년 전, 지금의 소니 모습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소니는 기술력, 디자인, 마케팅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지위를 점하고 있던 기업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니는 어떤가. 국수주의적이고 자존심 강한 일본의 대표 기업이었던 소니의 CEO는 현재 미국 출신의 전문 경영인이 맡고 있다. 그나마 이 회사가 다시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도 확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예전 소니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그저 반도체만 만드는 줄 알았던 한국의 삼某전자라는 회사가 차지하고 있다.
소니의 위기는 자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 영화판에서도 그 냄새가 스리슬슬 나기 시작한다. 양적 우세가 질적 우세를 담보할 수 없음에도 양적 우세를 질적 우세와 동일시하는 착시현상이 우리 영화판에 드리워져 있다. 연말 시즌에 맞춰 쏟아져나온 로맨틱코미디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시나리오가 작품의 질을 좌우하는 이 분야에서 최고의 작품은, 올해도 영미권 영화였다(<로맨틱 홀리데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낸시 메이어스 스타일을 흉내낸 한국영화 시나리오들이 충무로에 대략 10여편은 돌아다니고 있으리라. 이들 중 운 좋은 한두편은 내년 말쯤 영화로 완성되어 개봉될 것이다. 지금까지 쏟아져나온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러브 액츄얼리>의 아류들의 편수만 생각해보더라도, 이런 예상은 단순한 억측은 아닐 게다. 그리고 이것이 어디 로맨틱코미디만의 얘기겠는가.
하여 이제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다른 어떤 곳이 아닌, 우리의 발밑을. 공허한 양적 팽창이 만들어낸, 빈 공간의 크기를. 일본 속담에서 말하듯, 후회는 앞서 오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