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라이프>(삼협호인)(지아장커) 개인적으로 올해의 영화. 댐건설로 폐허가 된 싼샤에 아내를 찾기 위해 온 한 남자와 남편을 찾기 위해 온 한 여자가 떠돈다. 두 사람은 단 한 장면도 마주치지 않고 영화 안을 떠돌아다닌다. 그들이 마주치는 곳은 이따금 시선을 돌리는 하늘뿐이다. 마치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풍경과 무자비하게 진행되는 땅 위의 건설. 중국 인민 지아장커가 오늘의 세계화 자본주의 중국의 ‘상황’을 살아가는 방식. 거의 절망의 바닥까지 온 탄식에 가득 찬 마지막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마지막 장면’과 마주치고야 만다. 한마디로 굉장하다!
<라스트 데이즈>(구스 반 산트) 자살에 관한 명상적 관찰. 죽어가는 시간과 죽어버린 시간이 서로 숨바꼭질을 벌인다. 사막에서 친구를 죽이고 살아 돌아온 한 남자.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학교에 총기를 들고 등교한 다음 친구들을 몰살한 두 소년.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문득 자살한 커트 코베인. 살인과 자살의 나라 미국에서 시민 구스 반 산트가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 <게리> <엘리펀트>에 이어지는 구스 반 산트가 질문하는 세개의 죽음에 대한 세 번째 서술.
<마음들>(알랭 레네) 결국 누벨바그의 결론은 알랭 레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알랭 레네는 다시 한번 영화가 뇌의 스크린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혹은 그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 때마다 그만큼 영화의 가능성의 지평이 더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의 <스모킹/노 스모킹> 이후의 걸작.
<해변의 여인>(홍상수) 1부가 이어질 때 나는 심드렁했다. 그런데 갑자기 1부가 끝난 다음 느닷없이 2부가 시작되면서 영화는 괴상해지기 시작한다. 초현실주의적인 상상의 세계. 거의 몽환적이라고 할 만큼 복잡한 동선과 봄날의 우아한 해변의 공기. 유머가 넘치는 대사. 홍상수의 새로운 경지.
<흑사회> 1, 2편(두기봉) ‘마스터’ 두기봉의 새로운 걸작. 타란티노도 울고 갈 만한 장면이 즐비하다. 아마도 유위강의 <무간도>에 이어지는 새로운 연작. 포스트홍콩 누아르의 미래. 여전히 영화도시 홍콩이 얼마나 흥미로운지를 보여주는 예.
<망종>(장률)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시네아스트 장률이 바라보는 중국. 조선족 최순희는 모든 노력 끝에 김치에 쥐약을 넣은 다음 전멸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슬프지만 눈물 한 방울없이 진행되는 이야기는 이제 고향에 돌아가 모내기를 해야 하는 망종의 계절에 끝난다. 고향에 돌아올 수 없는 시네아스트의 향수의 엔딩.
<평범한 연인들>(필립 가렐) 1968년 5월, 파리의 연인들은 희망을 버리고 자멸해간다. 흑백의 화면 위에서 전개되는 역사의 종언. 기나긴 시간 동안 자기의 시대를 연장시키기 위해 매달렸던 필립 가렐의 작별인사 혹은 자포자기.
<더 선>(알렉산더 소쿠로프) HD영화 시대에 우리는 아우라를 포기해야 하는가? 소쿠로프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항복 선언 직후 신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온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삶 가까이 다가간 소코로프의 카메라는 점점 희미해져가는 일본의 태양 히로히토의 마지막 빛을 담기 위해 최대한 노출을 열어놓는다. 오로지 HD카메라만이 가능한 빛과 그림자의 세계.
<폭력의 역사>(데이비드 크로넨버그) 크로넨버그는 점점 불가능한 이야기에 도전하듯이 영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샘 페킨파도 미처 다룰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 매우 논쟁적이며, 놀랄 만큼 창의적이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더글러스 서크) …파스빈더가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를 본 다음 영화를 깨달았다고 말했을 때 참 별나게 신기한 깨달음도 다 있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긴 공백 이후 올해 시네마테크에서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내가 완전히 잘못 알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리적 바로크주의라고 부를 만한 저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이 금방이라도 부서져내릴 듯한 순간들. 특히 이 영화에서 보여준 우아하고도 비참한 전쟁의 비전들은 심금을 울릴 만했다. 나는 올해 장마가 쏟아지는 여름, 서크 영화의 눈물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회한에 찬 반성을 하고 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