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해야지, 뭘 어깨를 나란히 해
충무로 최고의 뉴스메이커이자 파워맨이 돌아왔다. 시네마서비스에서 손을 떼는 등 영화산업의 일선에서 물러나 연출에만 전념하겠다던 강우석 감독이 ‘백의종군 선언’을 깨고 충무로의 격전장으로 컴백한 것이다. 가족이 거주하는 캐나다에서 한달간 머물다가 귀국한 지난 11월19일 이후 그는 자신의 복귀를 선언하기라도 하듯 바쁜 행보를 펼치고 있다. 500억원 규모의 강우석 펀드를 거의 완성했으며, 시네마서비스를 다시 친정 체제로 꾸리며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고, 나아가서는 충무로의 근본적인 구조조정을 외치고 있다. 그의 이 같은 움직임은 그의 주장처럼 “충무로에 대한 애정과 충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다시금 충무로 최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기 위해 ‘과욕의 승부’를 벌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강우석 감독에게서 그의 귀환에 관해 들어봤다. 영화만큼이나 거침없는 그의 반말투를 그대로 살렸음을 밝혀둔다.
-강우석 펀드는 다 구성됐나. =어제(12월12일) 실무를 맡는 스튜디오 2.0 김승범 대표하고 통화해보니까 12월24일쯤이면 종료된다는 것 같더라고. 한두 군데가 아직 준비 안 된 모양이야.
-굉장히 다양한 자본이 참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영화계에 한번도 돈을 대본 적 없는 데만 다 들어온 모양이야. 제1금융권과 대기업도 포함돼 있다는데, 돈이 들어와봐야 밝힐 수 있다고 하네. 대충 들은 얘기로는 그냥 대기업이 아니고 진짜 센 곳이라고들 하더라고.
-500억원이나 되는 거금인데, 투자할 곳은 정했나. =처음에는 들어오는 시나리오들 중에 절대로 까먹지 않을 영화 위주로 투자할 거야. 그리고 3D로 만들어지는 <로보트 태권브이> 같은 프로젝트는 신경을 쓰고 있어.시네마서비스 영화 중에서는 장윤현의 <황진이>나 김유진 감독의 <신기전>에 들어갈 거고.
-500억원 중 직접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건 어느 정도인가. =다 하지, 뭘 다른 사람이 해. 펀드를 내 이름으로 하는데. 내 이름을 걸었는데 딴놈 쓰게 하고 책임은 나보고 지란 말이야?
-이 판을 만든 건 스튜디오 2.0의 김승범 대표와 신보창투라고 하던데. =아, 승범이와 신보창투 대표는 이런 역할을 해준다고. 정말 안 될 것 같은 프로젝트가 있으면 감독님 이건 진짜 안 됩니다, 하면서 막아주는 역할 말이야. 그리고 또 나한테 직접 시나리오를 주기는 뭐한 애들이 많을 거라고. 그건 승범이를 통해서 주라는 거지. 그중에 나는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승범이가 자신이 있는 영화라면 스튜디오 2.0으로 가야지. 난 <집으로…>나 <가족> 같은 영화는 못한다고. 승범이는 나한테 없는 것을 갖고 있어서 시너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무래도 500억원 중 상당 부분이 시네마서비스쪽으로 가지 않나. =시네마서비스에는 돈이 그렇게 필요없어. 강우석 펀드는 시네마서비스에도 투자하겠지만, 싸이더스 영화에도 투자할 수 있고, 다른 데 영화에도 투자할 수 있다니까. 왜냐하면 이 펀드의 일차적인 임무는 수익률을 내는 거란 말이야. 영화가 돈이 되는 사업이란 걸 보여줘야 영화계에 돈이 들어올 거 아냐. 그렇기 때문에 다른 제작자들도 나에게 문을 좀 열어줘야 돼. 나 개인으로 보면 수익률이 60%가 될 때까지 5년 동안 인센티브가 하나도 없어.
-그럼 강우석 펀드는 시네마서비스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되나. =어차피 내가 시네마서비스의 김인수 대표나 밑의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게 있어. 당분간은 내가 오케이하는 영화만 가주라는 거야. 그러니 시네마서비스에 대해 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그래서 강우석 펀드는 거기에는 일정 지분만 가려고 그래. 이를테면 모든 영화에 10%씩 간다든지.
-그럼 펀드에서는 내년에 몇편이나 투자할 생각인가. =내가 보기에 한국영화 전체의 3분의 1은 들어갈 것 같은데. 한 20편?
-강우석 펀드는 언제부터 생각한 건가. =올 초부터 생각했나? 영화판이 엄청 어려워지겠다 싶더라고. 지난해에 영화사들이 마구 우회상장하고 이 영화 저 영화 막 들어가는 걸 보면서 머지않아 다들 자금난에 허덕거리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 상장사들이 부실해서 무너지고 나면 돈 없어서 영화 못 찍는 시기가 온다고 예상했다고. 그리고 그게 실제로 맞았잖아. 나는 내년으로 봤는데, 벌써 올 하반기에 그 상황이 왔다고.
-어떤 과정으로 결성됐나. =김승범 대표와 신보창투에서 먼저 제안이 왔어. 그런데 내가 6개월을 안 만나줬어. 사실 나한테는 짐이라고. 남의 큰돈을 갖고 굴린다면 마치 내가 돈에 환장한 놈처럼 보일 수도 있고 잘못 운영하면 무능한 놈이라고 죄다 내가 뒤집어쓰게 되잖아. 하지만 우후죽순처럼 영화가 만들어지는 걸 보면서 저 돈이 다 빠져나갈 게 보였고, 앞으로 영화는 어떡하나 걱정이 된 거야. 그런 것 때문에 만들게 됐지.
-본인의 이름을 걸고 하는 거라 분명히 부담은 되겠다. =나는 내일이라도 ‘펀드 구성 실패했습니다’라는 전화가 오기를 기다려. (웃음)
-일차적으로는 수익률이 중요한 것 같은데, 명분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니 그 둘 사이에 어떤 원칙을 세워놓았나. =없어. 어떤 경우에는 명분만 좇을 수도 있고, 어느 순간에는 수익만 좇을 수도 있어. 다만 초반에는 수익률을 보여줘야 한다고. 처음에는 나름대로 돈벌이 되는 영화로 가고 시간이 흐르면서 시나리오는 좋은데 돈은 안 될 것 같은, 예를 들면 이창동 감독 영화 있잖아. 그런 거는 가겠다 이거야.
-그간 궤적을 보면 어려운 시기에 <실미도>가 터진다든가 하면서 난세의 영웅이 되곤 했는데 이번에도 새로운 자금을 들고 나타나서 충무로에서는 나름 환영하는 분위기더라. 이번 컴백도 애초부터 반응을 예상하고 한 건가. =솔직히 말하면, 내가 연출에 전념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건 앞으로 영화산업에 안 끼어들겠다는 거라고. 영화나 찍고 쉬다가 골프나 치고 그러고 싶었다고. 그런데 내 눈에 보이는 충무로는 너무 가라앉고 있더라고. 어떤 영화를 봐도 관객이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 않고. 그걸 보면서 ‘가만있어봐, 내가 지금 너무 노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 =9월에서 10월 정도. 제작되는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시네마서비스 영화에 전혀 관심을 안 갖고 있다가 나중에 다 비디오로 봤잖아. 그런데 누가 이런 영화 하자고 결정했나 싶었어. 충무로가 전반적으로 망하는 길로 뛰어가고 있는데 시네마서비스가 앞장서고 있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더라고.
-자연스럽게 시네마서비스 이야기로 넘어왔는데, 얼마 전 김인수 대표를 제외한 이사진을 내보내고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얼마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어. 야, 우리 회사 직원들이 왜 이렇게 영화인 같지 않냐고. 왜 이리 다들 일반 직장인들처럼 보이냐. 모두들 자기 파트 일만 하고 우리 회사에서 어떤 영화가 들어가는지도 모르더라고. 시나리오도 잘 안 봐. 그게 영화사냐고. 불과 5~6년 전만 해도 내가 김미희, 최용배, 이하영 이렇게 몇명만 데리고 1년에 10편 가까이 만들어냈는데 지금은 직원이 30~40명에다 부서도 많은데 인원이 부족하다는 소리나 하고 말이야.
-그러면서 다시 일선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가. =그럼. 나서더라도 조금만 있으면 당연히 빠져줄 거야. 그러나 이제부턴 다들 책임지자 이거야. 우리가 무슨 영화를 찍고 있고, 왜 이 영화가 안 되는지, 왜 이 영화는 이 정도로 배급해야 하는지, 왜 이 영화는 마케팅비를 이 정도 써야 하는지 모든 직원들이 깨닫자 이거야. 내가 의사결정에 개입한다고는 해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일일이 말하겠다는 게 아니라고. 정말 들어가지 말아야 할 영화만 못하게 붙잡겠다는 거야.
-이사진 대다수의 사표를 수리하신 이유는 뭔가. =일단 잔챙이들이 꿈을 갖고 뛰는 회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 젊어지란 거지. 그리고 관료주의가 필요없는 회사로 가야 하고. 의사결정하는 데 윗선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고. 내보냈지만 이사진들한테 독립법인을 만들게 해서 시네마서비스 일을 맡길 거라고. 그리고 부사장하던 김상진한테는 옛날에 내가 만들어준 제작사 있잖아. 감독의 집이라고. 그걸 복원시켜줬고. 역시 부사장이던 장윤현한테는 계속 네 영화만 찍으라고 당부했다고.
-그 두 감독을 부사장에 앉힌 건 바로 본인이잖나. =아, 그때야 내가 일을 안 해보려고 그런 거지. (웃음)
-김인수 대표를 유임시킨 배경은 뭔가. =책임을 지라는 거지. 그리고 자기의 꿈을 한번 더 펼쳐보라는 거지. 이번에 대화를 많이 했는데 알고 보니까 김인수 대표도 자기의 구상을 실험하고 있었던 거야. 그것을 갖고 내년부터 펼치려 했던 거더라고. 그래서 네 뜻대로 해보라고 한 거야.
-사실 충무로에는 김인수 대표님에 대한 동정론이 있었는데, 시네마서비스가 CJ의 2중대 역할을 하면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거죠. =내가 그 2중대라는 말을 듣고 기겁했잖아. 왜 그런 말까지 나오게 회사를 운영하냔 말이지.
-그건 감독님이 뿌려놓은 씨앗 아닌가요. =아니지. 내 뜻을 잘못 안 거라고. 이렇게 움츠리라는 뜻이 아니었다고. 돈을 확보해줄 테니까 열심히 뛰라는 얘기였지.
-하여간 2중대 얘기로 돌아가면…. =아, 2중대 아니야. 왜 자꾸 2중대래. CJ도 시네마서비스가 2중대이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럼 CJ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 =이미경 부회장과 내가 정확하게 얘기한 게, 지금도 독립법인이긴 하지만 독립 경영체제로 가자는 거라고. 이미경 부회장은 시네마서비스가 ‘영화 제일 많이 만드는 회사였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대신 KnJ에서는 CJ를 좀 도와달라는 것이고. 그래서 <신기전>처럼 확실한 영화를 CJ에 넘겨서 배급에 도움을 주자는 거라고.
-시네마서비스를 재정비해서 결국 ‘신 빅3체제’를 만들 계획인가. =빅스리?
-CJ, 쇼박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건가. =1등 해야지, 뭘 어깨를 나란히 해.
-시네마서비스가 내년에 아이필름의 영화 5편을 투자·배급하기로 했는데, 어찌 보면 굉장히 상징적으로 들린다. 아이필름은 싸이더스HQ의 자매회사잖나. 매니지먼트쪽과 대립한 게 바로 지난해인데, 이제는 손을 잡았다는 의미로 보인다. =남들은 내가 그들을 공격할 때 앞으로 캐스팅을 어떻게 하려고 저러냐 그랬겠지만, 난 그거 안 믿거든. 서로 잘할 수 있는 역할이 분담돼 있잖아. 그걸 하자는 거지. 얼마 전에 정훈탁 IHQ 대표와 밥을 먹었는데, 이젠 그들이 영화제작이 정말 어렵다는 걸 알고 있더라 이거지. 그래서 정말 선수들에게 맡기자고 하는데 그런 걸 왜 내가 안 알아주냐고. 무슨 철천지원수 졌어. 그리고 오기민 대표는 <여고괴담> 때부터 알아왔잖아. 믿을 만하다는 거지.
-어쩌면 아이필름과 관계를 맺은 게 싸이더스HQ와 돈독하게 지내면서 캐스팅의 이점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니지. 내가 찍는 영화야 거기에 손을 내밀어본 적이 없지만, 시네마서비스 영화에는 다 나오고 있잖아. <왕의 남자>에 원래는 장혁을 캐스팅했었고, <황진이>에도 송혜교가 왔잖아.
-결국 스타 권력화에 대한 문제제기를 접은 건가. =지금 환경이 바뀌지 않았나. 아직도 스타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나. 지금은 누가 캐스팅이 됐다고 해서 투자가 되는 게 아니라고. 이럴 때 좋게 지내고 같이 거품 빼자, 그런 의미에서 손을 벌린 거지. 이럴 때 등돌리고 있으라면 같이 죽자는 거야?
-결국 <한반도>를 안 물어볼 수 없는데, 흥행결과와 반응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나. =나는 충격이라기보다는 시대를 좀 봤어. 패를 봤다 그럴까. 내가 씹히는 영화를 처음 만들어본 게 아니라고. 그런데 내가 이번에 뭘 느꼈냐면, 이 사람들이 참 헷갈리고 있구나. 영화를 판타지로 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가장 판타지로 만든 영화를 현실 정치와 엮어서, 감독 개인을 엮어서, 내 정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그 공격을 받으면서 서글프더라고.
-많은 매체들은 <한반도>가 너무 설교조의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외치고 부르짖는다고 비판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런 표현의 글은 별로 없었어. 하여간 나는 사람들을 잃었다고. 글을 보면 이게 사람에 대한 공격이냐 영화에 대한 공격이냐 금방 보이잖아. 그래서 그런 게 조금 서글펐다고. 이런 말 하면 웃을지 모르지만, 영화 좋게 봤다고 모르는 사람에게서 전화를 가장 많이 받은 게 <한반도>야. 참 아이러니지. 그리고 평소 알고 지내던 김용옥 선생은 전화까지 했더라고.
-지금은 <한반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지금도 후회가 없어. 이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아직은 거리를 두고 싶지 않아. 한 2~3년 뒤에 이 영화를 다시 꺼내보면 뭔가 보일 수도 있겠지.
-새 작품 구상은 하고 있나. =지금 시나리오 몇개를 쓰고 있는데 좀 편한 것을 가려고 해.
-많은 사람들이 코미디를 기대하고 있는데. =내가 시나리오들을 보면서 돌아요, 돌아. 이걸 코미디라고 썼냐고. 내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코미디를 쓴 걸 본 사람은 <투캅스>랑 <마누라 죽이기> 쓴 김성홍 감독밖에 없어. 그리고 조금 스타일은 다르지만 장진 정도뿐이야. 하여간 코미디는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여간 ‘백의종군 선언’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바로 일선 복귀를 한 게 부담되지 않나. =내가 정치인도 아닌데 무슨 상관있어? 나는 충무로가 진짜 위기라고 본 거라고. 내가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으면 장기불황이 온다 이런 생각을 진짜 했다니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여보세요, 내가 정말 나쁜 짓을 할 뻔했어. 사실 와이프와 꼬맹이를 캐나다에 두고 있는데, 이번에 하마터면 영주권 신청할 뻔했다니까. 교육비 문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내가 와이프를 설득했어. 한국영화 감독 강우석이가 캐나다 영주권이나 갖는다면 어떻겠냐고. 돌아온 것을 고맙게 생각하라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