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돼 있습니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쉴 곳이 필요해>(Gimme Shelter)는 롤링 스톤스의 악명 높은 히트곡이다. 제대로 알아먹기 힘든 그 노래는 두 주체의 외설적 대화 혹은 분열된 자아의 이중 음성을 담고 있다. “폭풍우가 지금 내 삶을 위협하고 있어… 쉴 곳이 필요해”라는 겁먹은 듯한 독백 다음에 “그건 그냥 지나가는 것일 뿐이야… 강간, 살인, 그건 그냥 지나가는 것일 뿐이야”가 이어지고 “사랑이란 말이야, 아가씨, 그건 그냥 지나가는 키스일 뿐이야”라고 끝맺는다.
마틴 스코시즈는 전작 <좋은 친구들>과 <카지노>에도 이 음악을 썼지만 <디파티드>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살인자, 신성모독자, 여성혐오자, 인종주의자, 동성애혐오자 그리고 아이리시 갱 두목인 프랭크 코스텔로는 이 노래와 함께 등장해 보스턴의 아일랜드인 갱의 역사를 요약한다. 그리고 어린 소녀를 희롱하며 자신의 아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에게 ‘쉴 곳’(shelter)은 그의 범죄 사업을 보호해줄 유사아들이다.
<무간도>를 원작으로 삼았지만 <디파티드>는 더없이 훌륭한 도입부만 보면 상반된 운명을 지닌 두 청년이 아니라 이 악마적 인간에게 바쳐진 영화 같다. 근사하게 시작되는 <디파티드>는 그러나 끝내 동의할 수 없는 영화다. 주관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이 영화는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사랑한 이상심리의 뒷골목 사내들이 주인공이고, 오랜 동료 스쿤메이커의 현란한 편집은 보는 이의 눈을 홀리기에 충분하며, 마이클 볼하우스의 빛나는 장면들이 간혹 등장하지만 스코시즈의 인물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코스텔로 역의 잭 니콜슨, 형사로 위장한 갱 설리반 역의 맷 데이먼, 갱으로 위장한 경찰 코스티건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그리고 입이 걸레인 디그냄 형사 역의 마크 월버그 등 쟁쟁한 스타들이 즐비한 <디파티드>는 스코시즈의 영화 가운데 가장 높은 흥행성적을 올렸다. 그럴 만하다. 그의 영화 가운데 가장 덜 불편하며,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뛰어난데다 이야기는 숨가쁘게 달려가고 극히 폭력적이지만 유머도 풍부하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하지만 그뿐이다. <디파티드>에서 잭 니콜슨의 연기에 찬탄하는 것은 얼마간 자연스럽지만, 좀 새삼스럽다. 잭 니콜슨은 원래 그만큼은 했다. 그가 “빌어먹을 쥐새끼들 때문에…”라며 쥐새끼 같은 표정을 지을 때, 감탄사를 감추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의 얼굴에서 더 깊은 지옥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배트맨>의 조커나 <이스트윅의 마녀들>의 박사보다 <디파티드>의 악당 프랭크 코스텔로가 더 매력적이진 않다.
엉성한 플롯이 지배하는 영화
스코시즈는 이야기에 주로 의존하는 감독은 아니다. “1960년대 초반 고다르와 트뤼포의 영화는 내 마음에 계속 남아 있는데, 그들에게서 배운 것은 내러티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실망을 안겨준 <갱스 오브 뉴욕>과 <에비에이터>에서조차 스코시즈는 영화적 초상화에 몰두했다. 뒷골목 인생들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룰 때도 스코시즈는 자화상을 그리거나, <시민 케인>을 언제나 다시 쓰려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스스로 ‘갱스터의 인류학’으로 부른 <좋은 친구들>에서조차 저 난폭하고 가련한 조 페시의 이미지에, 심지어 시대극인 <순수의 시대>의 품위있고 내성적인 귀족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이미지에도, 트래비스 비클(<택시 드라이버>)과 제이크 라모타(<분노의 주먹>)가 겹쳐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디파티드>는 정반대로 간다. 이 영화는 캐릭터가 아니라 플롯의 영화다. 짐 호버먼이 “21세기가 돼서야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만큼 이 시나리오는 탁월하다”고 절찬한 <무간도>가 원작이니 이건 당연할 수도 있다(<무간도>의 훌륭한 점은 극히 복잡한 구성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캐릭터영화의 한 정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디파티드>는, 우리가 스코시즈에게 바란 점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사건이 사건을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전형적인 플롯의 영화다. 문제는 플롯을 택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뒤로 갈수록 진부하고 엉성해진다는 데 있다.
예컨대 ‘citizen’이 겉봉에 씌어진, 갱들의 명단이 들어 있는 봉투를 드디어 신분을 노출한 형사 코스티건이 발견하는 장면은 너무 엉성하다. 영악한 위장 형사 설리반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할 수도 있는 위험한 문서를, 하필이면 코스티건이 와 있을 때 책상 위에 눈에 띄도록 내버려둔다. 또 하필이면 그때 설리반의 컴퓨터가 고장나서 그가 다른 방으로 가는 바람에 위장 갱 코스티건이 홀로 남아 그 봉투를 발견하게 된다. 설리반의 정체를 알게 된 코스티건이 자신이 그 봉투를 봤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다른 서류 밑으로 밀어넣고 도망가는데, 다시 하필이면 밀어넣다 말아서 자기 방으로 돌아온 설리반은 코스티건이 그 봉투를 보고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즉시 코스티건의 모든 자료를 삭제한다.
코스텔로와 설리반의 통화 내용을 담은 녹음테이프가 분명히 코스텔로의 변호사에게 가 있는데도, 코스티건이 죽고 난 뒤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설리반의 모습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 테이프는 왜 공개되지 않고 있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코스티건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에 개봉하라고 여의사 마들렌에게 전해준 노란 봉투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코스텔로가 설리반에게 경찰 미행을 중단시키라는 무리한 주문을 하고 굳이 마약을 찾으러가는 장면도(거기서 그는 죽는다) 설득력이 부족하다. 각본을 쓴 윌리엄 모나한은 뒷골목 인생들의 언어에는 능할지 모르지만(IMDb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fuck’과 그 파생어가 237번, 여성 성기를 뜻하는 ‘cunt’는 22번 나오며, 그는 이 단어들로 외설적이지만 유머러스한 대사를 빚어낸다), 범죄스릴러에는 자질이 부족한 것 같다. ‘쥐새끼’의 신분이 드러날 위험에 처한 설리반이 마들렌의 아파트에서 나누는 대화(“여기 고양이가 있나요”, “아니오”, “다행이군요”)에서 보여주는 잔재주도 거슬린다.
평면적인 수사학의 결말
<애프터 아워즈>(1985) 때부터 스코시즈의 동반자였던 명장 마이클 볼하우스의 촬영도 이번에는 너무 겉멋이 많다. 뮤직비디오풍의 트래킹 남발은 볼하우스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그리고 <무간도>의 촬영에 너무 충실한, 안이한 방식이다(그의 가장 훌륭한 촬영은 역시 <좋은 친구들>, 그중에서도 레이 리오타가 여자친구와 함께 지하계단을 거쳐 갱들의 바로 들어가는, 스테디캠을 이용한 롱테이크 장면이다).
물론 멋진 장면도 있다. 예컨대 코스텔로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함께 등장하는 도입부. 코스텔로는 기껏 몇십달러를 받으러 관할 바에 가서 주인을 위협하고(늙은 갱 보스가 이런 푼돈을 직접 수금하러 다니는 건 납득하기 힘들지만) 주인의 어린 딸을 은근히 희롱한 뒤, 바에 앉은 소년 설리반에게 식료품을 안겨준다. 코스텔로가 소녀에게 말을 거는 동안 화면에는 그녀와 소년 설리반이 함께 잡히는데, 이상하게도 소녀의 모습은 포커스 아웃되고, 코스텔로를 바라보는 소년의 두려움과 동경이 섞인 얼굴에 초점이 잡혀 있다. 이때까지도 코스텔로의 얼굴은 어둠에 싸여 거의 윤곽만 드러난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늙은 사내의 음산한 모습을 해맑은 소녀와 소년이 바라본다. 작위성이 지나친 조명과 촬영이긴 하지만, 도입부의 시퀀스 하나로 등장인물들이 속한 세계와 그들의 운명이 단번에 암시된다.
코스티건이 설리반을 쫓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들의 모자와 옷은 너무 비슷해서 멀리선 구분하기 힘들다. 코스티건의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던 설리반이 쇼윈도 안의 샹들리에의 조각 거울에 난반사되며 수십개의 이미지로 다시 나타날 때, 코스티건의 큰 눈이 그 위에 겹쳐진다. 갱이 형사를 쫓는가. 형사가 갱을 쫓는가. 혹은 자신이 자신을 쫓는가. 그들은 모두 자신의 조직에서 자신을 적발해야 하는 운명이다.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유명한 거울방 장면에 대한 오마주인 이 장면은 정체성의 혼돈이라는 주제의 멋진 시각적 번안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선 실소를 참기 힘들다. 설리반은 죽고, 출세의 상징인 황금색 주의회 의사당을 배경으로 죽은 설리반의 아파트 난간 위를 쥐가 기어간다. 이 마지막 장면은 상징의 도식성이 도를 넘어서 거의 자기 조롱처럼 보인다. 스코시즈가 이렇게 진부하고 평면적인 수사학의 결말을 택했다는 사실이 잘 믿겨지지 않는다.
보여주되 탐구하지는 않는다
<디파티드>에서 가장 동의하기 힘든 점은 세 인물의 성격화에 있다. <무간도>는 결국 자신이 자신을 배반하는, 정체성의 내파에 관한 영화였지만 스코시즈는 다른 길을 모색한다. 아마 가장 단순하게는 <디파티드>는 코스텔로라는 반미치광이의 초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건 스코시즈가 가장 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코스텔로의 남근 과시욕과 살인 충동은 거세공포와 강박증이라는 스코시즈적인 요소와 과격하게 결합해 새로운 인물을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코스텔로는 코스티건과 설리반의 상호 추적 스릴러에 밀려 뒤로 갈수록 비중이 줄어가다 20여분을 남겨놓고 죽어버린다.
<디파티드>는 코스티건의 초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맷 데이먼의 야비한 출세주의자 연기는 칭찬할 만하지만 막상 설리반은 별로 매력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더 유능하고 더 야비해야 했다. 그에 비하면 끝없이 불안과 고독에 몸을 떠는 디카프리오의 코스티건은 매력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는 코스텔로가 죽고 나서 설리반을 만나 “난 경찰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 내 신분 회복을 원한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이 찾고픈 정체성(identity)을 확신하고 있지만 문서상의 민간인이 되는 것 외에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듣지 못했다. 살인자를 앞에 두고도 손이 떨리지 않는다고 마들렌에게 고백한 뒤에도 장면마다 그는 지나치게 격앙되고 너무 많은 말을 한다.
혹은 <디파티드>는 유사가족 형성의 실패에 관한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중심인물들은 서로 아무런 혈연이 없지만 각각 아버지(코스텔로)와 어머니/연인(마들렌), 그리고 두 아들(설리반, 코스티건)의 자리에 있다. <디파티드>는 이 관계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의 징후를 보여주지만 그러나 그것을 탐구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한 사람을 동시에 어머니/연인으로 두고 있는데도 두 사내의 정서적 대립은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코스텔로는 자신이 양육한 설리반보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목적을 감춘 유사아들 코스티건을 더 믿고 녹음테이프를 남겨놓은 것으로 드러나지만, 두 유사부자의 교감은 극히 표피적으로만 다뤄진다. “코스텔로는 너보다 나를 더 믿었어!”라고 코스티건은 설리반에게 외치지만 그 대사를 뒷받침할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디파티드>는 어둠과 악에 속한 아버지와 선한 의지를 갖고 있으되 어둠의 굴레를 벗지 못한 아들이 만나 어떤 교감도 관계의 진전도 없이 모두 죽어버린 영화다. 그 죽음 자체에 몰두했다면 이 영화는 좋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디파티드>는 그 관계의 공허를 플롯의 속도와 서슴없는 폭력과 외설적 언어의 유희가 메운 영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디파티드>가 스코시즈의 가장 나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