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0일, 로버트 알트먼이 세상을 떠났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느꼈던 듯, 사라지는 것들의 아쉬움을 따스하게 위로했던 <프레리 홈 컴패니언>(2006)을 유작으로 남긴 채. 하지만 이미 알트먼은 자신을 비참하게 매장시켰던 무덤에서 ‘보란 듯이’ 부활한 감독이기도 했다. <야전병원 매쉬>(1970)로 시작된 명예로운 70년대가 끝나갈 무렵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옥 같은 80년대였다.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1976) 이후 증폭되었던 할리우드와의 갈등은 <뽀빠이>(1980)의 재난 이후 폭발하게 되었고, 알트먼은 80년대 내내 긴 공백기를 ‘강요당해야만’ 했다. 물론 잠깐이나마 영화연출을 하기도 했고, 옴니버스영화인 <아리아>(1987)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 시기 대부분을 알트먼은 TV영화와 연극 각본을 쓰면서 버텨야 했다.
1992년, 알트먼은 할리우드에 대해 신랄함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따금한 풍자가 돋보이는 <플레이어>를 통해 다시 지상의 세계로 부활한다. <플레이어>를 말하면서 그 도입부, 즉 롱테이크로 처리된 너무도 빼어난 시각적 스타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장면은 천재 감독의 칭호를 얻으며 데뷔했으나, 이내 할리우드의 잔혹함을 온몸으로 경험해야 했던 오슨 웰스의 할리우드 복귀작인 <악의 손길>의 도입부를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 도입부가 인용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알트먼의 영화적 서명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반골 기질과 예술가적 자의식으로 똘똘 뭉쳤던 알트먼이 할리우드로부터 ‘팽’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던 이미지에 대한 탐닉을 ‘보란 듯이’ 다시 뽐내면서 자신의 복귀를 공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10년이라는 시간이 자신의 이단아적 기질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음을 증명하려는 태도에서, 알트먼은 자신이 여전히 알트먼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알트먼이 오슨 웰스를 인용한 것은 웰스가 자신 이전에 가장 알트먼다운 감독이었을뿐더러 그 선언의 가장 효과적인 증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숏컷>(1993)에서 70년대의 명성을 완전하게 부활시켰다 해도, <고스포드 파크>(2001)를 제외하면 그의 90년대 이후 영화들은 이전의 영화적 성과에 비해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알트먼이 만신전에서 영생의 삶을 준비해도 좋을 만큼의 영화적 성취를 이뤄놓은 뒤의 일이다.
1970년대 감수성을 간직하며 눈을 감다
알트먼은 1970년대 감수성을 간직한 감독이었다. 반문화 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할리우드의 상황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지금은 거장이니 대가니 하는 화려한 수식어가 동반되지만, 당시만 해도 한낱 애송이였던 마틴 스코시즈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영화 세대의 감독들과 알트먼은 유사하면서도 다른 출신 배경을 지닌다. 이들 감독들이 주로 ‘영화 악동들’, ‘영화학교 세대’ 등으로 불리는 세대라면, 알트먼은 TV에서 영화로 건너온 이전 세대의 감독들에 더 가까이 있다(<야전 병원 매쉬>를 연출할 당시 그의 나이는 젊은 세대로 편입되기에는 다소 민망한 마흔다섯이었다). 하지만 그가 뉴 할리우드 감독 중 가장 먼저 작가의 칭호를 얻으면서 그 리더처럼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보다 반문화적 정서로 요약될 수 있는 1970년대 감수성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트먼에 필적할 만한 1970년대 감수성을 지닌 영화학교 세대의 감독으로는 브라이언 드 팔마 정도가 고작이다. 자신보다 스무살은 어린 조지 루카스가 <THX-1138>에서 <스타워즈>로 변화하며 주류 문화에 항복할 때, 알트먼은 여전히 1970년대 감수성 안에 있었고, 눈을 감는 날까지 70년대 감수성을 외면하지 않았다. 흔히 할리우드의 주류 문화에 대한 반기로서 여겨지는 ‘알트먼식 스타일’이나 할리우드 영화산업에 고개를 뻣뻣하게 치켜든 채로 자신의 영화세계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예술가적 자의식 역시 1970년대 감수성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코폴라가 <대부>의 연출을 의뢰받았을 때, “그들이 내게 이런 쓰레기를 연출하래요. 나는 예술영화를 하고 싶어요”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처럼, 당시의 젊은 감독들은 예술가로 숭배받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러한 믿음을 끝까지 철회하지 않은 감독은 드물었다.
물론 때로는 과잉적인 예술가적 자의식, 또는 유럽 예술영화에 지나친 애정과 경도로 인해 주제가 곧잘 스타일 속에 증발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한 미국의 평론가 로빈 우드는 알트먼을 ‘젠체하는 속물 근성’에 빠져 있다고 폄하하기도 했다(<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 실제로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를 개작한 듯한 <세여인>(1977)이나 <이미지>(1972) 등은 알트먼의 예술가적 자의식에 짓눌려 힘겨워하는 인상을 주고, 피터 비스킨트가 저술한(폭로한) <헐리웃 문화혁명>에서 알트먼이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을 연출할 무렵 보여주었던 여러 모습에는 속물 근성이 노골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알트먼을 두고 예술가적 자의식 과잉이네 어쩌네 논하는 것이 그리 험담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과잉으로 넘쳐나거나 속물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예술가적 자의식이야말로 10년간의 무덤에서 그를 부활시키고 영생의 삶을 안겨준 궁극적 힘이었으니 말이다.
구심력을 원심력으로, 할리우드적 중심에서 달아나기
우리는 알트먼을 입력하면 거의 기계적으로 출력되는 ‘다층적인 내러티브’로 ‘알트먼식 스타일’을 지적하곤 한다. 실제로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영화들인 <야전병원 매쉬> <내쉬빌> <숏컷> <고스포드 파크> 그리고 아쉽게도 그의 유작이 된 <프레리 홈 컴패니언>까지, 알트먼은 인물들이 떼로 한 공간에 모여 벌이는 여러 사건들을 에피소드적으로 연결해나가는 방식을 즐겼다. 그것이 <내쉬빌>이나 <숏컷>처럼 한 마을일 수도 있고, <고스포드 파크>처럼 대저택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다수의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며 발생하는 사건들이 다소 느슨하게 엮여간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가 직조한 다층적인 내러티브는 할리우드영화의 전형적 문법을 해체하는 것, 즉 특정한 중심으로 향하는 ‘구심력의 내러티브’를 ‘원심력의 내러티브’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알트먼 영화의 이러한 특징은 그가 어떻게 중심 사건을 주변화하는지와 함께 살펴보아야만 한다. 이는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의 리메이크작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공통의 사건과 인물을 공유할 뿐 하등 관계없는 작품으로 완성된 <보위와 키치>(1974)의 연출 스타일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은행을 털기로 한 세 주인공이 있다. 은행 앞에서 준비를 끝낸 그들 중 한명은 차를 몰기로 하고, 두명은 은행을 털기 위해 그 안으로 들어간다. 일반적인 할리우드 갱스터영화라면, 카메라가 인물들과 함께 은행 안으로 들어가 그들이 은행을 터는 장면을 화면 속에 담는 것이 당연할 테지만, 알트먼은 두 인물이 은행으로 들어가는 순간 ‘엄청난’ 줌아웃으로 은행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자동차로 그 관심을 돌린다. 그리고 카메라는 은행 주변에서 맴돌 뿐, 관객이 갱스터영화에 기대하는 사건장면을 생략해버린다. 심지어 그들 중 한명의 죽음은 라디오 방송보도를 통해 사소한 듯 처리해버리기조차 한다.
알트먼이 <내쉬빌>이나 <숏컷> 같은 영화에서 다수의 에피소드들을 균등하게 다루면서 ‘중심 사건’이라는 설정 자체를 제거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특정 주인공이 중심인 영화일 경우에도 중심 사건을 오히려 주변화함으로써 주류 할리우드영화의 내러티브 구조를 배신하는 것이다. 이는 알트먼이 장르영화의 형식을 빌리면서도 장르영화라 부를 수 없는 작품들을 연출했던 것과도 연관된다. 전쟁영화인 <야전병원 매쉬>, 서부영화인 <맥케이브와 밀러부인>, 필름 누아르인 <긴 이별>(1973), 갱스터영화인 <보위와 키치>, 추리극인 <고스포드 파크>까지 그의 영화는 무늬만 장르영화이지 장르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광산촌을 배경으로 한 <맥케이브와 밀러부인>은 서부영화가 신화적인 성공담을 쓰던 자리에서 영웅의 패배담을 기록해나간다. 서부영화이면서도 서부영화가 아닌 것이다.
알트먼이 ‘구심력의 내러티브’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은 그의 영화연출 스타일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특히 흥미로운 방식 중 하나는 사운드를 통해 영화적 공간을 탈중심화하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무진장 시끄러운 영화라 할 수 있는 <야전병원 매쉬>는 대화, 음악,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방송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때로는 이들 모두가 뒤섞이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공원에서의 차가운 나날들>(1969)에서부터 본격화된 ‘공간의 사운드적 실험’은 프레임 내·외부에서 들려오는 여러 소리를 통해 프레임 내부에 한정되는 영화적 공간을 그 외부로 확장하기도 하고, 프레임 내부의 어떤 중심에 고정되기 쉬운 관객의 시선을 프레임 곳곳으로 방황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낳는다. 물론 이는 프레임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쉴새없이 떠들어대는 선거 유세 차량이 등장하는 <내쉬빌> 등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인물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 이내 흩어지면서 형성되는 산란적 공간 감각을 중요시하고, 주변에 맴도는 인물들의 시선이 암시적으로 작용하면서 공간의 중심을 해체시키는 <고스포드 파크>의 연출 전략과 조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탈중심화 전략은 그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열렬한 재즈 애호가로서의 알트먼의 열정이 고스란히 내러티브화된 <캔사스 시티>(1996)가 대표적이다. 전체적으로는 느슨한 작품이지만, 과거와 현재가 도통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들어가는 내러티브 구조는 연속적이고 인과율적인 시간 감각에 길들여진 관객의 영화적 도식을 마비시켜버린다. <캔사스 시티>를 걸작이라 부를 수는 없다 해도, 우연성과 즉흥성을 우선시했던 알트먼의 특징이 제대로 집약된 영화임은 분명해 보인다.
거만하지만 취약한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
<숏컷> 이후 알트먼의 최고작이라 불러도 무방할 <고스포드 파크>는 부르주아 세계와 하인 세계의 인물들이 엄격히 분리되도록 연출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 경계가 사라지며 함께 뒤섞여 있는 모습을 들춰낸다. 알트먼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엔딩을 지닌 <숏컷>에서도 좀처럼 함께 엮여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인물들의 사연들이 순간적인 지진에 의해 다 함께 요동칠 때, 그리고 <내쉬빌>에서 무심하게 분리되어 진행되던 다수의 에피소드가 영화의 엔딩에서 한순간 응집되어 폭발하는 순간의 영화적 쾌감은 실로 압권이다. 이처럼 알트먼의 인물들은 서로 무심한 듯하지만, 흔들리기 쉬운 동일한 토대 위에 존재하는 허약한 인물들이 주를 이루곤 했다. 물론 누군가가 10편 정도는 찍어야 담을 수 있는 인물들을 단 한편에 집약시키곤 했던 알트먼의 수많은 인물들의 특성을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대체로 그의 인물들은 ‘거만하지만 취약한 정체성에 시달리는 인물들’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고스포드 파크>의 위선에 가득 차 있던 부르주아들도 빼놓을 수 없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인물들로 만연한 작품은 <내쉬빌>일 것이다. <내쉬빌>의 중심 인물들(직접 세어본 적은 없으나 세간에는 24명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대부분이 컨트리송 가수인 탓에 많은 이들이 꿈과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노래들을 들려주지만, 실제의 그들은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와는 달리 삶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심리적 이방인’일 뿐이다.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취약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비뚤어진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단적인 예가 자존심 하나로 살인사건을 조사해가는 필립 말로우를 등장시킨 <긴 이별>인데, 이 작품에서 알트먼은 필름 누아르의 신화적 인물인 필립 말로우를 눈앞의 진실조차 보지 못하는 무능한 탐정으로 탈신화화한다. ‘짝퉁 말로우’라 불러도 무방할 <긴 이별>의 말로우는 자신이 조사하는 진실에 대한 단서가 발견되는 상황임에도 그저 어린아이처럼 오가는 파도 앞에서 노닐고 있다. 알트먼은 이 장면을 무척 시네마틱하게 연출하는데, 진실의 단서가 제공하는 두 남녀는 해변에 위치한 집의 거실에서 대화하고 있고, 카메라는 그 거실의 큰 창 너머의 실외에서 이를 담고 있다. 이 때 해변에서 놀고 있는 말로우의 모습이 창에 투영되며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처럼 표현되는데, 이를 통해 대화 속에 드러나는 진실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숏컷>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알트먼의 인물들은 도덕적, 정서적인 위험 상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그 혼란함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무력감에 허덕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숏컷>의 에필로그처럼 그들은 여전히 진실에 눈감고 있으며, 예전처럼 바비큐 파티를 열기도 할 것이고, 무심한 듯 그렇게 모였다 흩어지며 살아갈 것이다. 바쟁의 ‘애매성(ambiguity)의 리얼리즘’의 가장 단적인 실천이 아이러니하게 안토니오니의 모더니즘 영화에서 발견되듯이, 알트먼이 자신의 영화 속에 포착하고자 한 현실은 진실이 겉으로 명확히 드러나는 세계가 아닌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야 희미하게나마 포착될 수 있는 모호한 세계이다. 알트먼이 인과율적으로 잘 직조되거나 공간적으로 통합된 할리우드 신화를 해체하고자 한 이유는, 그것이 자신이 경험했던 부조리하고 모호한 현실을 배신하는 할리우드의 영화적 효과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알트먼은 그러한 현실을 등지고 다시 무덤으로 내려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부활 없는 안녕을 고했지만, 이제부터 알트먼은 그의 영화와 함께, 그리고 ‘알트먼식 스타일’이라는 고유명사와 함께 영생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영화를 보고, 기억하며, ‘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화 입문 시절이었던 나의 20대를 풍요롭게 해주었던 로버트 알트먼에게 고마움과 존경을 마지막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