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모녀의 내밀한 속사정
<세이빙 페이스> Saving Face 감독 앨리스 우/ 출연 미셸 크루시엑, 조안 첸, 린 첸/ 2004년/ 91분/ 소니픽쳐스
뉴욕에 사는 중국계 여성 윌(미셸 크루시엑)네 집안은 시끄럽다. 마흔여덟의 나이에 덜컥 임신을 한 엄마(조안 첸)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발설하지 않자 보수적인 가치관의 할아버지는 엄마를 집에서 내쫓는다. 결국 엄마는 윌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지만, 윌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있다. 그건 윌이 레즈비언이며 비비안(린 첸)이라는 중국계 발레리나를 이제 막 사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가뜩이나 의사로 바쁜 일상을 꾸려가던 윌은 밖에서는 몰래 데이트를 즐기며 집 안에서는 하루종일 연속극만 보고 있는 엄마를 상대해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게 된다.
중국계 미국 감독 앨리스 우의 데뷔작 <세이빙 페이스>는 리안의 <결혼 피로연>이나 <나의 그리스식 웨딩>처럼 미국에 사는 비주류 민족 구성원들에게서 발생하는 전통 가치와 미국적 가치의 충돌을 다루는 로맨틱코미디다. <세이빙 페이스>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커뮤니티에 속한 관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들 영화와 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가 별 새로울 것 없다는 생각도 들고, ‘<결혼 피로연>의 여성 버전일 뿐’이라는 지적도 맞는 듯 보인다. 하지만 <세이빙 페이스>는 여성의 내밀한 속사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이들 영화와 약간 궤를 달리한다. 이 영화의 중심 이야기 축은 윌과 비비안의 사랑이지만, 윌과 엄마의 소통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장 예리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점이다. 서로 비밀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는 두 사람은 세대 차이에서 비롯된 문화적 차이를 겪지만, 삼류 신파 중국 연속극을 함께 보거나 하며 일상을 공유하는 동안 살가운 관계가 된다. 둘이 끝내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놓아주게 되는 것 또한 두 여성의 연대감에서 상당 부분 비롯된다. 결국 전형적인 결말을 피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지만 <세이빙 페이스>는 풍성한 이야기와 귀여운 캐릭터, 허를 찌르는 유머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잘 만든 로맨틱코미디다.
왜 개봉하지 못했을까? 가뜩이나 미국영화나 중국영화나 모두 흥행이 잘 안 되는데, 뉴욕의 중국인이 나오는 영화라면 과연…?
전투 대신 부조리가 폭발하는 전쟁영화
<자헤드> Jarhead 감독 샘 멘데스/ 출연 제이크 질렌홀, 피터 사스가드, 제이미 폭스/ 2005년/ 123분/ 유니버설
“4일4시간1분. 그것이 내 전쟁이었다.” 첫 번째 이라크 전쟁, 그러니까 걸프전에 참전한 스워포드는 이렇게 뇌까린다. <자헤드>는 1991년 걸프전에서 적들을 향해 “총 한방 쏘지 않고” 전쟁을 마친 스워포드의 이상한 참전기다. 전 미 해병대 저격수 토니 스워포드가 지은 책을 원작으로 삼는 <자헤드>는 그러니까 ‘전투없는 전쟁영화’다. 별달리 갈 데가 없어서 해병에 지원한 스워포드(제이크 질렌홀)는 훈련소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저격수가 되는 교육을 받는다. 그 와중 걸프전이 발발하고 스워포드는 트로이(피터 사스가드), 크루거(루카스 블랙) 등과 함께 이라크로 향한다. 사이크 상사(제이미 폭스) 부대로 들어간 그는 임무를 기다리며 긴장된 나날을 보내지만, 미군은 공습 공격만 계속할 뿐 지상전은 개시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석달 만에 저격 명령을 받고 출정하지만 허무한 결과를 맞을 뿐이다.
<아메리칸 뷰티> <로드 투 퍼디션>의 샘 멘데스 감독이 만든 <자헤드>는 초점을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한다는 면에서도 일반적인 전쟁영화와 완전히 다르다. 영화 초반 스워포드가 읽던 카뮈의 <이방인>처럼 스워포드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는 실존주의적 냄새가 물씬하다. 이 전쟁은 비이성적이고 부도덕할 뿐 아니라 실존의 부조리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스워포드를 비롯한 해병들은 사막의 열기가 만들어낸 권태와 고독 속에서 서서히 미쳐간다. 거기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위, 바람난 마누라의 편지 읽기, 종교 갖고 싸우기, 예전에 섹스했던 여자에 대한 품평”뿐이다. <자헤드>는 허망한 전쟁터 속 한 개인의 마음속에 거대한 사막이 생기는 과정을 집요하게 묘사한다. 스워포드가 수시로 겪는 괴이한 판타지는 그 반영이다. <자헤드>는 <서부전선 이상없다> <지옥의 묵시록> 등과 함께 전쟁의 소용돌이가 한 개인의 내면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쟁영화의 수작이며, ‘포스트 9·11 시대’에 대한 적확한 포착이다.
왜 개봉하지 못했을까? 전투없는 전쟁영화라니, 게다가 무거운 실존주의까지 감돌고 있으니 관객이 들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으리라.
필름 누아르에 대한 셰인 블랙의 농담
<키스 키스 뱅뱅> Kiss Kiss Bang Bang 감독 셰인 블랙/ 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발 킬머, 미셸 모나한/ 2005년/ 103분/ 워너
레이먼드 챈들러 스타일의 누아르영화가 꼭 흑백이나 대비가 강렬한 컬러로 찍혀야 할 필요가 있을까. <리쎌 웨폰> 시리즈와 <마지막 액션 히어로> <롱 키스 굿나잇>의 시나리오를 쓴 셰인 블랙의 연출 데뷔작 <키스 키스 뱅뱅>은 쨍한 캘리포니아의 햇볕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없는 밝은 화면으로도 누아르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누아르는 추악한 범죄, 예측불허의 음모와 배신을 담고 있긴 해도 뭔가 다르다. 근육질의 탐정은 게이인데다 주인공은 탐정과 함께 행동하게 된 좀도둑이고, 매력적인 외모의 여자는 치명적인 팜므파탈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뉴욕의 한 장난감 가게를 털던 해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경찰에 쫓기다 엉겁결에 한 영화의 오디션장으로 들어간다. 뜬금없이 탐정영화의 주연 후보로 발탁된 그는 LA로 가게 되고 파티장에서 고등학교 시절 흠모했던 하모니(미셸 모나한)를 만나게 된다. 그는 탐정의 세계를 자문해주는 현직 탐정 게이 페리(발 킬머)와 함께 어딘가로 가다가 의문의 살인사건에 연루된다. 얼마 뒤 하모니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해리는 더욱 깊은 음모의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이제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범죄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한다.
<키스 키스 뱅뱅>에서 험프리 보가트의 깊은 주름과 시가 연기를 찾는 건 무망한 일이다. 빡빡한 범죄소설의 플롯을 갖고 있지만, 이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자유롭기 짝이 없다. 작심이라도 한 듯 감독은 이야기라는 자동차를 급출발과 급회전, 급제동을 거듭하며 현란한 운전솜씨를 뽐낸다. 범죄영화라는 장르의 클리셰를 비틀어대는 데 열중한 탓에 때론 스토리를 쫓아가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폭력을 너무 쉽고 태연스럽게 드러낸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유희정신이 충만한 <키스 키스 뱅뱅>은 영화광들에게 극단의 재미를 선사하는 영화다. 그러니 영화가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관객에게는 ‘어깨에 힘을 뺀 채 이 영화를 보라’는 조언 대신 ‘아예 이 DVD를 선반에서 꺼내지 않는 게 낫다’고 충고해주고 싶다.
왜 개봉하지 못했을까? 레이먼드 챈들러와 필름 누아르,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를 모두 좋아할 한국 관객 수를 계산해보면 답이 딱 나온다.
퀴어 코드로 풀어가는 이색 첩보 액션
<디.이.비.에스> D.E.B.S. 감독 안젤라 로빈슨/ 출연 사라 포스터, 조다나 브루스터, 미건 굿, 데본 아오키/ 2004년/ 91분/ 소니픽쳐스
<디.이.비.에스>는 정부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네 소녀 이야기다. <미녀 삼총사>에 대한 맞대응 아니냐고? 하지만 <디.이.비.에스>와 <미녀 삼총사>의 관계는 핑클과 S.E.S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디.이.비.에스>의 에이미, 맥스, 도미니크, 재닛은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인 SAT 속에 숨겨진 문항을 통해 선발된 정부의 공식 지정 첩보원들. 네 소녀들은 단련(Discipline), 에너지(Energy), 아름다움(Beauty), 힘(Strength)의 약자를 따 ‘디.이.비.에스’(D.E.B.S.)로 불리는 비밀 조직의 구성원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소녀들에게 정부의 심각하고 살벌한 임무는 때때로 너무 버거운 짐이 되기도 한다. 특히나 남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에이미(사라 포스터)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때 악명높은 범죄자 루시 다이아몬드(조다나 브루스터)가 다시 나타났다는 첩보가 입수된다. 이 심각한 대치상황 에서 에이미와 루시는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레즈비언인 루시는 첫눈에 에이미에게 반한다.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에게 위협을 받아야 하는 루시의 입장도 기구하지만, 맹렬히 쫓고 있는 적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이미의 상황도 어이없긴 마찬가지다.
<디.이.비.에스>는 첩보 액션영화를 퀴어영화 코드로 꿰어낸다. 007 시리즈에서 숱하게 볼 수 있었던 성적 매력을 가진 적과 첩보원의 대결구도는 레즈비언 버전으로 변조된다. 실제로 레즈비언인 안젤라 로빈슨 감독의 동명 단편영화를 확장한 <디.이.비.에스>는 또한 성정체성을 깨닫고 자신의 길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에이미의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 진지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다. 이야기 또한 비약이 심하다. 로저 에버트가 별점 1개 반을 내던진 것도 비슷한 사정에서 비롯된 듯하다. 하지만 <디.이.비.에스>는 퀴어영화의 유쾌한 장르적 확장을 확인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물론 남성 관객이라면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액션을 펼치는 쭉쭉빵빵 미녀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겠지만.
왜 개봉하지 못했을까? 퀴어라는 소재만으로도 한국시장에선 부담스럽다.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가 선풍을 일으킨다면 또 몰라도….
미식축구를 통해 본 10대들의 인생과 승부
<프라이데이 나이트 라이트> Friday Night Lights 감독 피터 버그/ 출연 루카스 블랙, 빌리 밥 손튼, 개릿 헤들런드/ 2004년/ 118분/ 유니버설
승패를 본질로 하는 스포츠는 그 자체가 훌륭한 드라마이며,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스포츠영화에서 중요한 건 경기의 진행 과정이나 액션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아니다. 스포츠를 매개로 인간들의 삶을 진하게 그려내지 못한다면 그 영화는 무가치하다. 1988년 텍사스 퍼미안 고등학교 미식축구팀의 실화에 바탕한 <프라이데이 나이트 라이트>는 스포츠영화의 계율을 충실하게 따르는 작품이다. 텍사스주 소도시 오데사는 고등학교 미식축구 시즌을 앞두고 들떠 있다. 지역 주민들이 퍼미안 고등학교팀에 거는 기대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의 희망과 보람은 오로지 퍼미안 팬서스가 텍사스주 챔피언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기대에 부응해 팬서스는 전통의 명문으로 군림해왔다. 시즌 개막전, 오데사 주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러닝백 부비 마일스가 큰 부상을 입는다. 감독 게인즈(빌리 밥 손튼)와 쿼터백 마이크(루카스 블랙) 등 선수들은 이제 부비 없이 우승에 도전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애니 기븐 선데이> 같은 영화와 달리 <프라이데이 나이트 라이트>의 초점은 게인즈 감독이 아니다. 미식축구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어머니를 둔 마이크, 과거 주 챔피언을 차지했던 아버지의 폭력을 감수해야 하는 단(개릿 헤들런드), 무릎 인대 파열로 손에 잡았던 부와 명예를 놓쳐버린 부비 등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은 이들을 단지 시즌 몇개월 동안 최고의 성과를 내야 하는 스포츠 선수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을 살아갈 준비를 하는 청소년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경기장면을 빠른 인서트 컷으로 흘려버리는 대신 10대들이 자신의 인생과 승부를 펼치는 드라마에 집중하는 이 영화의 전략은 결국 감동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프로 선수가 될 확률이 거의 없는 이들에게 중요한 건 텍사스주 챔피언 반지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용기와 자신감이라는 것을 <프라이데이 나이트 라이트>는 설득력있게 전한다. 물론 아이들에게 그 지혜를 알려준 것은 미식축구라는 스포츠였다. 올해 초 동명의 TV시리즈가 제작돼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왜 개봉하지 못했을까? 한국에서 미식축구는 여전히 미지의 스포츠인데다 스포츠영화는 대박난 적이 없다.
미국 중산층의 흔들리는 삶
<킴 베신져의 바람난 가족> The Door in the Floor 감독 토드 윌리엄스/ 출연 제프 브리지스, 킴 베이싱어, 존 포스터, 엘르 패닝/ 2004년/ 111분/ KD미디어
저명한 아동문학가이자 화가인 테드(제프 브리지스),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의 마리온(킴 베이싱어)은 어린 딸 루스(엘르 패닝)와 함께 그림 같은 풍경의 한적한 해변 마을에 살고 있다. 그러던 이들 앞에 여름방학을 맞아 테드 친구의 아들인 대학생 에디(존 포스터)가 나타난다. 문학도인 에디는 테드의 조수가 되기 위해 이곳을 찾았지만 도착하는 첫날부터 마리온에게 반하고 그녀를 갈망하게 된다. 마침 테드와 마리온은 잠정적인 별거에 동의해 바닷가 집과 시내의 아파트를 하루씩 번갈아가며 쓰게 된다. 에디와 마리온은 정사를 나누게 되고, 테드 또한 그동안 그랬듯이 중년 여성들을 성적으로 유혹한다.
<사이더 하우스> <사이먼 버치> 등을 쓴 미국의 작가 존 어빙의 소설 <1년 동안의 과부>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토드 윌리엄스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넉넉하다. 영화는 테드와 마리온 사이의 비밀을 클라이맥스에 숨겨둔 채 미국 중산층의 흔들리는 삶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특히 과거의 쓰라린 사건에서 연유된 부부의 불화는 이상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영화 전반에 불안감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기분좋은 유머와 상념을 잠재우는 풍경들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백미는 배우들의 연기다. 원숙한 제프 브리지스는 물론이고 섹시 이미지만 두드러졌던 킴 베이싱어 또한 그동안 축적된 연기력을 발산한다. 다코타 패닝의 동생 엘르의 깜찍한 연기도 눈여겨볼 대목.
한국판 DVD 제목은 센스가 엿보이지만, 너무 연연했다가는 후회하기 십상이다. ‘킴 베신져의’란 구절은 그녀의 야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암시일 터. 50대임에도 훌륭한 몸매를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전라 베드신이 등장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워낙 멀리서 우아하게 촬영된 탓에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할 듯. 또 ‘콩가루 가족’ 이야기는 <바람난 가족>과 유사하지만, 부르주아 가족제도에 문제제기하는 임상수 감독과 달리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원제 <바닥의 문>(The Door in the Floor)은 영화 속 테드가 쓴 동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부부의 어두운 과거를 상징한다.
왜 개봉하지 못했을까? 킴 베이싱어가 나오는 에로영화라면 몰라도 문학성이 그득한 드라마라니, 이건 아니잖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작화 감독의 데뷔작
<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 茄子 アンダルシアの夏 감독 고사카 기타로/ 목소리 출연 오이즈미 요우, 가케이 도시오, 고이케 에이코/ 2003년/ 47분/ 프리미어
세계 3대 자전거 대회로 꼽히는 스페인의 ‘벨타 아 에스파냐’에 출전 중인 프로 사이클 선수 페페(오이즈미 요우)는 어느 날 고향인 안달루시아의 한 지방을 통과하게 된다. 이날은 형의 결혼식이 열리는 경사스러운 날이기도 하다. 한데 어떤 연유에선지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은 갑갑해지고 얼굴도 굳어지고 있다. 그때 레이싱팀 감독이 페페에게 앞서 치고나갈 것을 명령하지만, 실상 그의 역할은 에이스 선수를 위한 페이스메이커에 불과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나 에이스가 부상을 입자 감독은 미리 힘을 뺀 페페에게 우승을 목표로 삼으라고 지시한다.
“나는 멀리 가고 싶다.” 그는 쓰라린 상처를 남긴 고향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채간 형의 결혼식도 멀리 하고 싶었고, 2류 선수라는 설움에서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팀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그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질 때까지 페달을 밟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막 같은 안달루시아는 좀처럼 멀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의 마음속으로 고향은 성큼 들어와버린다.
<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은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고사카 기타로의 데뷔작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작화감독을 맡았던 인물답게 그는 자전거 레이스 현장을 생동감있게 묘사한다.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하는 속도감과 상쾌하게 스쳐가는 배경 화면 속에서 자전거 주행의 청량한 느낌을 담아냈을뿐더러 거칠고 굵은 선으로 묘사된 마지막 스퍼트 장면은 선수들의 가쁜 호흡까지 전해준다. <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의 진정한 백미는 속도감과 대비되는 차분한 성찰이다. 한 남자의 아주 특별한 귀향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이 작품은 낭만적인 음악과 아름다운 화면, 그리고 신파조로 기울지 않는 절제된 표현으로 고향과 가족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일본 만화가 구로다 이오우의 <나스>(茄子: 가지) 시리즈 중 첫 번째 편이 원작인 이 47분짜리 작품은 잘 삭은 가지 절임에서 감칠맛을 느낄 수 있는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다. 애초 비디오용으로 기획됐다가 극장 개봉까지 하게 된 <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은 칸영화제 감독 주간에 최초로 초청된 일본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왜 개봉하지 못했을까?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만 봐야 한다는 게 한국시장의 불문율 아닌가. 그러니 이렇게 성숙한, 게다가 47분짜리 애니메이션이 극장에 걸릴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