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교외에서 살고 있는 하루노 가족의 일상은 저마다 분주한 편이다. 아들 하지메(사토 다카히로)는 짝사랑하던 소녀가 전학갈 때까지 고백을 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전학생과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만다. 딸 사치코(바노 마야)는 언제나 따라다니는 커다란 자기 자신의 환영이 언제쯤 눈앞에서 사라져줄까 궁금하다. 엄마 요시코(데즈카 사토미)는 살림을 하는 틈틈이 애니메이터로 일하고 있고, 비밀스러운 골방에 틀어박힌 할아버지는 소리굽쇠의 소리를 즐기거나 이상한 쿵후 동작을 해보이곤 한다. 삼촌 아야노(아사노 다다노부)는 자신을 찼던 여자가 결혼했다는 사실에 쓸쓸해한다.
<녹차의 맛>은 사치코가 철봉 거꾸로 오르기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정도를 제외하면 궁금한 사건이 거의 없는 영화다. 그 대신 <녹차의 맛>은 길게 호흡하면서 순간을 바라볼 수 있는 여백을 주곤 한다.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우산을 줄 수 있었던 남자아이가 비를 맞으며 달리는 길이 어떻게 물리적인 법칙을 초월하는지, 사랑을 놓친 남자의 마음이 주변 공기에 어떤 기운을 불어넣는지, <녹차의 맛>은 무한의 시간을 앞에 두었다는 듯 천천히 여유롭게 들여다본다. 순간순간이 다르고, 순간순간이 빛이 난다. 아야노가 숲에 응가를 했다가 저주를 받은 황당한 에피소드와 어린 사치코가 해바라기 씨앗 사이를 떠도는 어여쁜 판타지가 한데 어울리며 다정하고 씩씩한 하루노 일가의 삶을 빚어낸다.
빗방울처럼 튀어오르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녹차의 맛>은 그 때문에 때로는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과장된 동작은 가끔 불편하고, 체조 같은 안무로 <산이여>를 부르는 뮤직비디오는 다소 식상하며, 하지메의 틴에이저 로맨스는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할아버지가 죽은 다음 <녹차의 맛>은 평범하지 않은 광채를 띠며 깊숙한 내부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할아버지가 골방 창문으로 무엇을 내다보았는지, 우산을 쓰고 걸어오던 며느리에게 왜 다시 한번 걸어보라고 말했는지, 그가 남긴 수채화를 뒤적이던 가족들은 뒤늦게야 깨닫는다. 그리고 함께 웃는다. 고정된 액자처럼 별다를 것 없고 잔잔한 이 장면은 <녹차의 맛>이 그저 재기있는 영화를 넘어 좀처럼 잊기 힘든 여운을 남기는 순간이다. 비슷한 것 같아도 모두 다르고 특별하지 않아도 오래도록 혀끝에 감도는, 잡맛과 잡내를 씻어내 깨끗한 미각으로 음식을 대하게 해주는 녹차의 맛처럼, <녹차의 맛>은 마음을 청량하게 만드는 영화다. 깨끗해진 것 같은데도, 무언가가 남아 있다.